'서울의 봄' 앗아간 전두환을 그때 막지 못했던 이유[이승환의 노캡]

박 대통령 사후 권력 실세로 급부상…'하나회'와 군사 반란
자신 좌천시키려 한 정승화 체포 지시…대통령 사후 재가

편집자주 ...'12·12 군사반란'을 조명한 영화 이 흥행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반란을 주도했던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은 영화에서 '전두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요. 우리 근대사의 비극으로 기억되는 그날에 관객들은 왜 주목하는 걸까요?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반란군을 막지 못했는지 다뤄보겠습니다.

26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가 걸려 있다. 2023.11.26/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1979년 10월26일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서울의 봄'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서울의 봄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빗댄 표현이다.

"전두환을 한직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 무렵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당시 50세)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당시 53세)에게 이 같은 인사 조처를 건의했다. 노 장관에게는 부담스러운 요청이었다. 전두환을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천거한 사람이 노 장관이었다.

노 장관은 "지금 수사 중인데,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정 총장의 인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재판을 받는 중인데, 수사 책임자인 전두환을 교체하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승화는 왜 전두환을 좌천시키려 했을까?

정 총장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10·26 사건)에 따른 과도 정부에서 계엄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아 사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는 군 쇄신을 위해 정치 군인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 총장이 지목한 정치 군인은 보안사령관 전두환(당시 48세)이었다. 보안사령관은 '투 스타' 보직이지만 '문고리 권력'(대통령과 가까운 실세)이라 불렸다. 문고리 권력 서열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보안사령관 순이었다.

그러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과 서열 2위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하면서 순식간에 문고리 권력 1~3위가 공백 상태에 빠졌다. 서열 1위 김계원 비서실장과 서열 3위 김재규는 10·26 사건과 관련한 혐의로 체포됐다.

'서열 4위' 전두환은 어떻게 됐을까?

권한이 그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전두환은 과도 정부에서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합수본부)의 수장 본부장을 맡는다. 합수본부는 보안·헌병·검찰·경찰·중앙정보부 등 모든 정보 수사기관의 업무를 조정 감독한다.

법률상 직위는 중앙정보부장이 합수본부장보다 높다. 그러나 합수본부장은 계엄 정권 하에 수사 전권을 틀어쥔다. '훨훨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전두환을 인사 조치해야 합니다"

정 총장은 그런 전두환의 쿠데타 기미를 감지했던 걸까? '견제'해야 했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하다. 전두환은 잦은 월권행위와 군 지휘체계 문란행위 당사자로 지목됐다. 각 부처 장차관이 전두환에게 보고를 하고 결재를 받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 배경에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있었다.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해 4년제 정규 과정을 졸업한 영남 출신의 육사 11기들이 주축으로 구성됐다. 추정 인원은 200~300명이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군 내 사조직은 불법이다.

하나회는 원래 박 대통령의 친위조직을 자임했다. 박 대통령 사후 전두환 아래로 다시 헤쳐 모이고 있었다. 하나회는 '정치 군인'을 배제하려는 정 총장의 인사 기조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극비 정보가 하나회를 거쳐 전두환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1979년 12월 9일 정 총장이 노 장관과 골프를 치면서 전두환의 보직 전출을 건의했다는 정보였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자는 내용이었다. 전두환 측에 이를 제보하는 사람은 훗날 김용휴 국방부 차관으로 밝혀졌다.

◇사흘 뒤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이 일어난다

이날(12월12일) 저녁 정 총장은 보안사 요원들에게 연행됐다. 대통령 재가 없이 이뤄진 체포였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반란군은 북한군을 견제해야 하는 전방부대와 공수부대까지 끌어들여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있는 서울을 점령했다. 반란 성공을 위한 감청, 도청, 회유 작업이 이날 밤 끊임없이 이어졌다.

12·12 군사반란은 유혈 사태이자 전례 없는 하극상이었다. 박 대통령 사망 48일째 만에 발생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전두환이 자신의 거취와 관련한 '개인적인 이유'로 본인을 위해 일으킨 쿠데타였다.

전두환 정권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강제 징집된 '녹화·선도공작'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24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2021.2.24/뉴스1 ⓒ News1 오대일 기자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왜 전두환을 왜 막지 못했을까? 전두환을 향한 하나회의 조직적인 충성, 군 장성들의 출세 욕구,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무능과 보신주의, 반란 진압에 나섰던 육군본부의 형편없는 대응 능력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그러나 그 어떤 요인보다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의 권모술수는 상식을 뛰어넘었다.

교활하고 음험한 수작이었다. 보안사는 정 총장 연행의 사유로 10·26 사건 피의자 김재규의 범행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운다

실제로 정 총장은 박 대통령이 시해된 당일, 현장인 청와대 인근의 궁정동 안가(安家)에 가까이 있긴 했다.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안가 인근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 총장의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사건 사흘 뒤인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참고인 신분으로 합수본부의 조사를 받는다.

합수본부의 수사 결과는 '무혐의'였다. 정 총장의 무혐의를 발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전두환이었다. 그는 그해 11월6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군 또는 외부의 개입이 10·26사건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안사는 이런 무혐의 발표를 뒤집고 정 총장에게 10·26 관련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1979년 12월12일 오후 7시쯤이었다

정 총장은 공관에서 아내와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부관 이재천 소령이 "보안사(보안사령부) 처장이 보고하러 왔다"며 정 총장에게 알렸다. 정 총장이 1층 거실로 내려가자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과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중 허 대령은 허화평·안현태와 함께 육사 17기 '하나회'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훗날 5공 실세인 허화평·허문도와 함께 '스리허'로 불렸으며 신군부의 정권 찬탈 후 대통령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으로 영전했다.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씨의 발인이 진행되고 있다. 2021.11.27/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허 대령은 정 총장에게 "김재규에게 돈을 많이 받았더군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김재규는 합수본부 조사에서 정 총장에게 700만원을 건넸다고 진술한 바 있다. 반면 정 총장은 추석 선물로 300만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정 총장은 "(무혐의로) 끝난 사안 아니냐"고 허 대령에게 말했다. 하지만 허 대령은 "진술을 녹음하게 저희 부대로 가주셔야겠다"고 했다. '체포하겠다'는 의미였다.

정 총장은 반발했다 "내가 계엄사령관이야! 버르장머리 없는 X들 같으니. (당시 대통령인) 최규하 대통령이 허가를 했느냐"고 대로했다. 그러자 허 대령은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고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전두환은 총리공관에 있는 최 대통령을 찾아가 정 총장의 연행을 동의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최 대통령은 국방장관을 통해 건의하라며 거부했다. 다음 날 새벽 대통령의 '사후 재가'가 이뤄졌으나 당시엔 대통령 재가 없이 이뤄진 강제 연행이었다.

허 대령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정 총장은 대통령이 자신을 오해한 줄 알았다. 부관에게 "(대통령이 있는) 총리공관에 전화를 걸라"고 지시했다. 이 소령이 현관 왼쪽에 있는 부관실로 뛰어가자 난데없이 총성이 울렸다. 허 대령과 우 대령은 양쪽에서 정 총장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 가자"

정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색 야전점퍼를 입은 군인이 현관 창문을 깨고 나타났다. 그는 M-16 소총을 들고 있었다. 군인은 공포탄을 쏜 뒤 총구로 정 총장 가슴을 쿡쿡 찔렀다. 정 총장은 뺨에 총구가 닿은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박 대통령 사후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가 만든 책 '5공 전사'에는 다음 대목이 나온다.

"노태우 장군에 의하면 10·26 사건의 수사를 완결하기 위하여 정 총장을 수사해야겠다는 합수본부장 전 장군의 결심이 이미 11월 초에 확고히 섰으며 다만 적절한 시기만 기다려 온 것이다. (전두환은) 11월 중순부터 계획에 포함된 요원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 내밀히 임무를 부여하고 자체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기 시작했다."

정 총장 제거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됐던 쿠데타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군사 반란 전 전두환을 인사 조처했으면 어땠을까? 영화 '서울의 봄' 속 위태로운 장면을 보면서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그 시절 겨울은 길고 혹독했다.

전직 대통령 고 전두환씨의 손자 전우원씨가 17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중항쟁 제43주년 추모식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3.5.17/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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