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그룹이 일본군 변신, 위안부 유린…막가는 '팬픽'
선정적 상황 설정 위한 배경으로 차용
"공부 되고 인상 깊었다" 10대 감상평
역사의식 결여된 "철없는 행동" 비난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팬픽 등장인물의 트위터 계정. © News1
</figure>20대 직장인 여성 이모씨는 평소에 자주 찾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몇몇 웹사이트를 캡처한 이미지로 구성된 이 게시물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삼은 '팬픽'(FanFic)이 존재한다는 내용이었다.
팬픽들은 어린 소녀들을 일본군이 유린하는 장면을 잔인하고 선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일본군으로 등장시켜 미화하고 있었다.
이씨가 더욱 놀란 건 팬픽을 읽고 나서 "공부가 많이 됐고 인상깊었다"는 어이없는 소감까지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한 남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팬픽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선정적인 소재로 사용한 글이 등장해 충격을 주고 있다.
이 팬픽은 등장인물의 트위터 계정까지 개설돼 운영되자 이를 캡처해 비난하는 '정신나간 아이돌 팬들'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다수의 블로그 등을 중심으로 퍼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팬픽'이란 팬(Fan)과 픽션(Fiction·소설)의 합성어로 1990년대에 등장한 후 팬픽만을 다루는 온라인 커뮤니티 카페가 생겨나고 회원수가 10만명에 이르는 곳도 존재하는 등 팬덤 문화의 일부를 이루게 됐다.
단일 성별 멤버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이 대세가 되면서 한 그룹 내에서 짝을 지어 같은 멤버끼리 사랑에 빠지는 등 동성애와 관련된 내용도 많다.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다수의 블로그 등을 중심으로 이같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팬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다.
트위터에서는 "지금 작가는 사과문 올린다고 해놓고 잠수상태다. 팬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시는 와중에 너무 철없는 행동이다" 등 맹비난이 이어졌다.<figure class="image mb-30 m-auto text-center border-radius-10">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팬픽에 대한 트위터 반응. © News1
</figure>문제가 된 아이돌 그룹의 팬픽 외에도 특히 남성 멤버로 구성된 아이돌 팬클럽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등장 인물로 내세운 팬픽이 한두 작품씩 있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형 포털사이트 등에서 '위안부 팬픽'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인기 남자 아이돌 그룹이 연관검색어로 뜰 정도다.
역사적 문제제기를 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선정했다기 보다 선정적인 장면을 등장시키기 위한 배경으로 선택된 작품들이 대다수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들 팬픽은 대부분 동성 간의 폭력적인 성행위를 지나치게 구체적·감상적으로 묘사하거나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 혹은 소년이 일본군 장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등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많다.
특히 이같은 팬픽을 만들고 읽는 사람 모두 대체로 10~20대의 어린 팬들라는 게 문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역사적 고증없이 쓰인 팬픽들을 실제 있었던 일로 받아들이고 있어 팬픽이 왜곡된 역사 인식과 잘못된 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유명 팬픽 작가는 팬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와 같은 대접을 받는 등 팬픽을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파급력 있는 영역이라는 평가다.
일부 팬클럽에 따라서는 팬픽만을 다루는 온라인 커뮤니티 카페의 회원수가 10만명에 육박하는 등 영향력 있는 팬 문화로 자리하고 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는 "문제가 된 글들을 보긴 했지만 아직 크게 여론으로 부각된 것은 아니어서 대응방식을 고민하고 있다"며 "다만 팬을 가진 가수에게도 좋은 이미지로 작용하지는 않을 텐데 왜 이런 글들을 방치하는지 의아하다"고 비판했다.
권경우 문화평론가는 "이명박 정부 이후 역사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지역폄하, 인종차별, 여성비하 같은 발언과 글들이 별다른 여과없이 공개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과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윤리적 판단이 사라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팬픽을 실제로 쓰고 읽는 사람들인 10대 청소년들은 아직 제대로된 지식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위안부 피해를 단순히 선정적인 소재로 차용한 측면이 강하다"며 "표현의 자유는 충분히 존중돼야 하지만 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책임이 따를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hm3346@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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