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월세 3만원·5평 원룸서 '제2 한강'을 꿈꾸다
성석제·김애란 등 걸출한 작가들 거친 문학계 성지 '연희문학창작촌'
가족과 떨어져 집필에 전념…"공공지원으로 문학생태계 계속 흐르게"
- 정윤미 기자
(서울=뉴스1) 정윤미 기자 = 지난해 성인 종합 독서율 43%.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간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지표다. 얼마 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쾌거는 독서 황무지인 우리나라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모처럼 서점가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출판업계도 활기를 되찾았다.
한강 작가가 쏘아 올린 대한민국의 독서 열풍, 더 나아가 앞으로도 한국 문학을 끌어 나갈 '제2의 한강'을 우리 문학계가 계속 배출할 수 있을지가 우리 사회의 과제로 남았다. 이 가운데 지난 15년간 서울 한복판에서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작가들과 시민들을 위한 공간을 운영한 조용한 마을이 있어 뒤늦게 조명을 받고 있다.
성석제, 김애란, 김초엽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작가들이 모두 거쳐 간 문학계 성지이자 '포스트 한강'을 꿈꾸는 작가들이 모여사는 이곳. '연희문학창작촌'(창작촌)이다. <뉴스1>은 지난 18일 오전 문학·작가·시민이 어우러진 이 동네가 위치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을 찾았다.
"한국문학을 이끌어가는 우리 작가님들이 거주하며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곳"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창작촌까지 도보 40분. 운동 삼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지만 초록색 서대문 마을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면 한번 연희교차로에서 한 번 환승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15분이면 도착한다.
서대문구보훈회관 정거장에서 하차해 버스가 지나온 길을 따라 몇 걸음 걸으면 표지판이 보인다. 화살표 방향으로 몸을 돌려 높은 붉은색 벽돌 담장을 따라가다 보면 커다란 대문이 등장한다. 어느 재벌가 회장님을 모신 차량을 마중 나온 듯 양쪽으로 활짝 열려있었다.
순간 '창작촌이 맞나'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대문 왼편에 있는 '연희문학창작촌'이라고 쓰여 있는 문패를 보니 작가들의 마을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문학을 이끌어가는 우리 작가님들이 거주하며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곳. 조용히 머물러 주세요'
대문을 지나 보이는 입간판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당부와 함께 주중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을 한다고 알리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연희문학창작촌은 2009년 옛 시사편찬위원회 부지를 리모델링한 서울시 최초 문학 전문 창작공간이다. 전체 6915㎡(2000평)에 4개 동, 19개 집필실과 시민들과 함께 향유하는 문학 공간과 야외무대가 있다. 문학 공간과 야외무대에선 문학낭독회, 문학교실, 작가세미나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곳곳에 '작가의 집필 공간입니다' '입주작가 외 통행을 삼가주세요'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창작촌 운영 전반을 담당하는 이승주 매니저는 "동네 소개 유튜브 채널에서 연희동을 다루면서 소개된 적 있는데 '한강 열풍'으로 방문객이 더 많아진 것 같다"며 "데이트하는 젊은 분들도 계시고 체감상 하루 평균 10팀은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책다방연희'라고 불리는 문학미디어랩에는 문학·예술 관련 도서 8000여 권이 소장돼 있다. 방문객도 자유롭게 책을 열람할 수 있다. 단, 대여 및 반출은 금지지만, 최근 한강 작가의 대표작 '채식주의자'가 무단 반출되는 사건도 있었다. 창작촌 관계자는 "다행히 빌려 간다는 메모를 남겨 놓고 가셨다"며 "곧 되돌려 주실 거로 믿는다"고 말했다.
연희동에 거주하며 종종 이곳을 찾는다는 20대 송 모 씨는 "도심 속에 있는 것 같지 않게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곳"이라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산책하는 등 나만의 힐링 아지트"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최근 방문객이 많아진 것 같다"며 내심 아쉬움을 드러냈다.
서울문화재단에 따르면 2024년 입주작가는 총 53명이다. 문학 장르별로 소설 17명, 시 13명, 어린이·청소년 9명, 수필 1명, 희곡 10명, 번역·비평 3명 등이다. 매년 공모를 통해 3개월 및 6개월 단위 입주작가를 선정한다. 대상은 등단 작가를 기준으로 하되, 비등단·미등단한 청년예비작가를 위한 별도 TO도 있다.
19개 집필실은 화장실 딸린 5평 원룸부터 개별 부엌까지 갖춘 방 세 개짜리 13평형까지 다양하다. 입주작가들은 집필실 규모에 따라 매월 3만 3000원부터 최대 14만 5000원을 소정의 관리비 명목으로 지불한다. 이외 나머지 공과금이나 부대 비용은 모두 재단에서 지원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최소 비용으로 거주하며 집필 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는 특장점 덕분에 입주 경쟁이 치열한 편에 속한다. 평균 경쟁률 3대 1로 추산된다. 이와 관련 이 매니저는 "입주작가의 경제적 형편이 심사 대상에 포함되진 않지만, 문학 글쓰기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밝혔다.
아울러 입주작가 외 다른 가족이나 반려동물 동반 입주는 재단 규정상 불가능하다. 그렇다 보니 부모작가 경우 거주 기간 동안 자녀와 떨어져 지내야만 한다. 재단 측에 따르면 지난해 입주작가 모집 당시 '어린아이와 동반 입주가 가능하냐'는 문의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두 자녀와 떨어져 홀로 창작촌에 거주하는 소설가 전지영 작가는 일주일에 4일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나머지 3일은 본가에 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 같은 고충에 공감을 표하며 "해외에는 어린아이와 동반 입주가 가능한 레지던시가 있는 거로 안다"고 밝혔다.
창작촌에서는 주요 사업 중 하나로 한국 문학 신작을 소개하는 '웹진 비유'를 발행하고 있다. 웹진 편집위원회는 지난해 11월 한국어 문학을 어떻게 하면 널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오랜 논의를 거친 끝에 전격 개편했다.
2개월 치 분량을 4회로 나눠서 발행해 독자들이 2주에 3~4개 작품을 읽을 수 있도록 해 독서의 부담을 줄여줬다. 또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모바일 중심 인터페이스를 설계했다. 그 결과 이메일 구독자는 3600명, 작품 1개당 평균 조회수는 약 1200회로 늘었다고 한다.
소박한 성과로 보일 수 있지만, 편집위원회는 이 작은 변화가 궁극적으로 독서율 증가에도 도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편집위 측은 "책 한 권은 어렵지만 작품 하나 읽기는 할 수 있다"며 "한 권 다 읽기 부담스러운 독자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접하는 문턱을 낮춰주고자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창작촌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승주 매니저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공공지원을 통해 계속 문학 생태계가 흘러갈 수 있게 해야 (향후 노벨문학상 수상과 같은) 특별한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아직 주목받지 못했지만 잠재력이 있는 작가, 또는 작가가 잠재력을 갖출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것이 저희 역할입니다"
younm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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