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서 독립운동한 증조부 뜻 이어 귀화…후손 증명에만 10년

[독립운동가 후손이 전하는 현실] ③우용준 광복회 금천구지회장
"한국인이란 사실 잊은 적 없어…예우 위해 국가가 먼저 나서야"

편집자주 ...3·1절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부터 지정된 국경일로, 광복 이전부터 독립운동가들과 우리 민족의 기념일이자 축제였습니다. 그러나 104년이 흐른 지금, 국가와 사회의 외면 속에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마음 한편에 간직해왔던 자부심마저 초라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뉴스1은 3·1절 104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목소리를 3편의 기획물에 담아 송고합니다.

독립운동가 우억만 선생 증손인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지회장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생활문화센터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2.27/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서울=뉴스1) 박상휘 박혜연 이정후 김진환 기자 = "증조부께서 아버지 손을 잡고선 '너는 꼭 한국으로 가라. 우리가 대대손손 살던 터가 거기 있다'고 하셨대요. 증조부 유해를 안고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더라고요."

독립유공자 우억만 지사의 증손자인 우용준씨(61)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증조부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우 지사가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그의 후손들은 중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우 씨는 "단 한 번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금 대한민국이 이만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 3·1운동 계기로 독립운동 뛰어든 우억만 지사

우씨는 할머니로부터 우억만 지사의 생애를 듣고 자랐다. 그에 따르면 우 지사는 집안에 여러 명의 일꾼을 둘 만큼 경상북도 영덕군의 지역 유지였다고 한다.

1919년 3월19일, 전국에서 펼쳐진 3·1운동의 열기는 우 지사가 있던 영덕군까지 번졌다. 네 형제 중 맏이였던 우 지사는 그의 형제들 및 주민 2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우 지사와 그의 동생 우주일 지사는 주동자로 붙잡혔고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우 지사는 가지고 있던 땅과 물건을 모두 팔고 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우씨는 증조부가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며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을 물심양면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증조할아버지(우억만 지사)가 만주로 떠나고 난 뒤에는 가세가 기울어 할아버지가 다른 집의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다"며 "증조부께서는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그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쓰셨다"고 했다.

2003년 8월23일 중국 땅에 묻혀있던 독립운동가 유해 3위를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기 위해 입국한 독립유공자 유족들(우용준씨 제공)

◇ 증조부 뜻 이어 귀화했지만…생활고로 고생해

광복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우 지사의 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쳤다. 우씨의 아버지와 우씨는 만주 땅에서 나고 자랐기에 중국은 우 지사 후손들의 새로운 터전이 됐다.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집안 교육을 받았지만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그가 직접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많은 문서가 사라진 상태였고, 증조부는 가명을 썼기에 기록은 더욱 찾기 어려웠다.

긴 시간 증조부의 흔적을 찾아 헤맨 끝에 우씨는 중국과 한국의 기록이 일치하는 호적부를 발견해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우씨는 "이를 입증하는 데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우 지사의 유해를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기 위해 2003년 한국으로 들어온 우씨는 귀화를 결심했다. 독립운동가였던 증조부의 뜻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당시 독립유공자의 증손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제공되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에서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뒤로 하고 찾은 한국에서는 일자리 찾기도 어려웠다. 생활고를 맞닥뜨린 우 씨는 막노동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지만 연변 말투로 인해 차별받기도 했다. 우씨는 "증조부께서 나라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렸는데 말투 때문에 중국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화도 많이 났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우억만 선생 증손인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지회장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생활문화센터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2.27/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 손자녀에 한정된 유족 혜택…"후손 위해 국가가 나서야"

우씨는 2012년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당시 월 35만원 수준의 보상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독립유공자 유족이 받는 보훈연금은 매년 인상되고 있지만 한계는 여전하다. 현행법상 독립유공자 손자녀 중 한 명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점 때문이다. 이에 독립유공자 유족임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나마 혜택을 받는 이들도 나이가 들어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독립유공자 유족의 범위를 '증손자'까지 확대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돼 있지만 2년 가까이 계류 중이다.

우씨는 "지역 유지였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돈을 모두 털어 독립운동을 했기에 후손들은 해방 후에도 가난하게 살고 있다"며 "후손들을 위해 국가가 응당 먼저 찾아다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군인에 대한 예우도 충분하지 않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예우도 부족한 건 마찬가지"라며 "우리 선조들은 국권을 침탈당한 상황에서 나라를 찾겠다는 정의감 하나로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독립운동가 우억만 선생 증손인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지회장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생활문화센터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2.27/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 잊히고 있는 독립운동…"명심하고 기억해줬으면"

우씨는 증조부의 뜻을 이어 금천구에서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0년에는 금천구에 존재하는 친일잔재를 조사하기 위해 2200만원의 예산안을 신청했지만 구의회에서 전액 삭감돼 추진하지 못했다. 우씨는 내년 예산안에 반영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도전할 계획이다.

3·1운동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기념비 제작에도 나섰다. 지난달 28일 서울시흥초등학교 운동장에는 '3·1독립운동 104주년 기념식 및 3·1만세운동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다. 1919년 3월, 당시 시흥공립보통학교였던 이곳은 3·1운동에 함께 하는 동맹휴교가 있었던 역사적 장소다.

선조인 우억만 지사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만큼 우씨에게 3·1만세운동 표지석 제막식은 감회가 새롭다.

우씨는 "여러 행사를 다녀보니 호국에 대한 조형물은 많지만 독립운동에 관련된 조형물은 많이 없더라"며 "독립운동이 점점 잊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젊은 세대들이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 기획취재팀(박상휘 팀장, 박혜연·이정후 기자)

leej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