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 의무 게을리한 거 아닌가"…'법 안락사' 나온 이유[법정1열]

대법 전원합의체 '장애인 접근권' 공개 변론 열어…3년 7개월만
질책성 질의 쏟아낸 대법관…승소 시 '입법 부작위' 첫 국가배상

편집자주 ...법원에 상주하며 재판에 들어가는 통신기자가 전합니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마주한 생생한 법정 현장과 미처 기사에 담지 못한 그 뒷이야기를.

조희대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차별구제 청구 등 소송 상고심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20년 가까이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기준을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는지 판단하기 위한 공개 변론을 연다. 2024.10.23/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접근권을 동등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50%를 했다면 모르겠는데 3%, 5%를 주장하는 정도라면 입법 의무를 게을리한 게 숫자로 명백한 게 아닌가요."

(서울=뉴스1) 황두현 기자 = 지난 23일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 변론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기준 법령을 개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소된 정부 측에 물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장애인 측이 '전국에 편의시설이 설치된 곳은 3%에 그친다'고 주장하자 정부가 "그보다 두 배는 될 것"이라고 반박한 데 따른 일침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면으로 양측 입장을 골고루 듣고 판결하는 대법관이 이처럼 공개 변론을 열어 소송 당사자에게 질책성 질의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3년 7개월만 전합 공개 변론…질책성 질의, 왜 나왔나

발단은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8년 제정된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3조는 휠체어 경사로 등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춰야 하는 기준을 바닥면적 300㎡(90여평)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조건을 충족하는 소매점은 0.1%에 불과했고, 20년이 지난 2018년에도 편의점은 1.2%, 약국은 1.5%에 그쳤습니다.

정부는 2022년에 바닥 면적 기준 50㎡(15여평)로 시행령을 개정했습니다. 이 소송 1심이 "해당 시행령이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배했다"고 판결한 이후였습니다. 다만 법원은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고 2심도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상고장이 접수된 지 2년여 만에 공개 변론을 열기로 했습니다. 별도 변론을 열지 않고 판결할 수 있는 대법원이 재판을 공개해 당사자·참고인의 의견을 듣는 건 이례적입니다. 이날처럼 대법관 13명이 모두 심리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공개 변론이 열린 건 3년 7개월 만입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차별구제 청구 등 소송 상고심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20년 가까이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기준을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는지 판단하기 위한 공개 변론을 연다. 2024.10.23/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대법관 "대체 가능한 권리냐" "올바른 선택지 아니었나"…집중 추궁

"카페나 편의점에서 즉자적인 걸 구현하지 못하고 집에서는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대형마트는 활동지원을 부르라니…(접근권은) 대체 가능한 권리로 쉽게 치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오경미 대법관)"1심 위헌 판결 2개월 후 신속하게 규정이 개정됐는데 그 이전과 비교했을 때 사회적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2022년 올바른 선택지였다면 그 이전에도 올바른 선택지가 아니었을까"(권영준 대법관)

많은 대법관은 그간 '장애인 접근권' 개선을 위한 정부 노력을 캐물었습니다. 특히 오 대법관은 "접근권은 보조인·온라인을 통해 대체 가능하다"고 말한 정부 측에 "일상에서 필요한 게 계획적으로 발생하느냐"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대법관들의 연이은 지적에도 국가의 입법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법적으로 배상 책임이 발생하려면 고의 또는 과실로 상대방에게 손해를 가했다는 점과(민법 750조)와 실제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법 개정 의무가 생긴 시점과 상황을 특정하기 어렵고, 2022년 이후에도 입은 정신적 손해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국내 사법 역사상 시행령 개정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된 사례는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두고 김중권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에게 중요한 건 국가의 위법한 행위일 뿐 고의·과실이 아니다"며 "위법한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이해하겠느냐"고 지적합니다. 한발 나아가 "일치하려면 고의·과실은 안락사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위법해도 무책임, 국민이 이해할까" 지적도…대법원 결론은

대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3시간 40분여간 변론을 마친 조 대법원장은 양측과 참고인 의견, 관련 기관이 제출한 의견서를 토대로 결론 내리겠다고 밝혔습니다.

판결에 따른 사회적 파장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만약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면 장애인 접근권뿐 아니라 교육권, 환경권 등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국가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과 별개로 논의의 장이 열린 점은 환영할 만합니다. 사회 각층의 이해가 충돌하고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런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 기회가 자주 열렸으면 합니다. 변론을 지켜본 한 법조인의 말입니다.

"정치인, 재벌 회장 사건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모든 국민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 더 주목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국민은 주권자이지 구경꾼은 아니잖아요."

ausur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