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태우고 철갑상어 대접…소수에 맞춘 김정은의 '연회 정치'
'백악관 로즈가든' 따라한 화려한 정원 연회 연출로 주목
특정 집단에 특별 대우하는 이벤트로…충성 유도 수단
- 양은하 기자
(서울=뉴스1) 양은하 기자 = "여기가 백악관 로즈가든인가요?"
지난 2021년 9월9월 북한의 정권수립일 73주년을 기념해 평양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열린 연회를 보고 나온 농담 섞인 반응이다. 잔디 정원 위의 둥근 테이블, 샴페인 잔을 채우는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들, 피아노와 첼로가 등장한 연회는 북한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생경한 장면이었다.
백악관 로즈가든의 연회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연회의 등장에 북한이 서양을 모방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김정은 총비서가 소위 '외국물' 좀 먹더니 화려하고 세련된 것에 매료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요즘 북한이 여는 연회는 단지 대외에 보여주기 위한 행사만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올해 들어서 북한은 유독 연회를 많이 열었는데 군 지휘관들, 고위 간부들, 중국·러시아 대표단 등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초대해 극진히 대접한 것을 알 수 있다.
김 총비서는 이들 앞에서 넥타이를 풀고 연회장에 흐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절대 권력'의 흐트러진 모습도 거리낌 없이 보여준 것이다. 이는 연회에 초대된 간부들에게는 최고지도자에게 '대접'을 받는 특별한 경험을 주는 기회다. 김 총비서에게는 연회가 또 하나의 통치 수단이 된 것이다.
△군 지휘관들에게 '백투혈통' 상징 '백마' 이벤트
지난해 4월25일 조선인민혁명군창건 90주년에도 당 본부청사에서 연회가 열렸다. 흰색 '원수복'을 입은 김 총비서와 '드레스 코드'를 맞춘 리설주 여사로 연회는 정권수립일 73주년 때보다 한층 화려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날 연회는 연회 자체보다도 별도 이벤트로 마련된 '백마' 행사가 주목을 받았다.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청사 정원 한쪽에서 군 간부들이 '백마'를 타고 한 명씩 기념사진을 찍었다. 승마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기념사진'을 찍는 이벤트였다.
북한에서 '백마'는 김일성 주석 때부터 '백두혈통'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런 이유로 지난 2월 인민군창건 열병식에서 김 총비서의 딸 주애의 백마가 공개되자 '4대 세습설'이 재점화되기도 했다. 북한은 열병식에 참가했던 각급 부대 지휘관들에게 이같은 '권위'를 가진 백마를 타게 해줌으로써 나름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고급 요리 철갑상어 테이블에…모자이크로 가린 요리도
연회에 차려진 요리도 특별했다. 지난 7월 전승절(한국전쟁 정전협정체결일·7월27일) 70주년을 계기로 방북한 러시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일행을 환영하는 연회에는 북한 내 최고급 요리 중 하나로 꼽히는 철갑상어와 바닷가재와 비슷한 대형 새우인 크레이피시가 올라왔다.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방북한 외빈 대접에 상당한 신경을 쓴 셈이다.
지난 8월27일 해군절(8월28일) 기념 연회에서는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모자이크 처리한 요리가 등장했다. 돼지 다리를 통으로 소금에 절여 만든 통햄인 '프로슈토'나 '하몽'으로 추정되는 음식인데 주민들이 접하기 힘든 식재료여서 이질감이나 '박탈감'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가린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추측이 맞는다면 이는 반대로 참석자들에게는 '차별화된' 특별 대우가 된다.
외래 문화를 경계하면서도 북한 연회는 항상 '서양식 식문화'로 세팅돼 있다. 칵테일잔, 와인잔, 샴페인잔, 포크, 나이프 등 서양식 식기류에 빵과 샐러드. 이는 평범한 북한 주민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식문화다. 연회에 초대된 노병, 원군미풍열성자, 노력혁신자들에게 이같은 경험이 오히려 '대접'받았다는 인상을 줬을 것이다.
△김정은과 더 가까이…리설주·주애와도 기념사진
연회는 김 총비서를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빼곡히 서서 찍은 김 총비서와의 단체사진도 '가보'로 여겨지는 북한에서 연회에 초대됐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것이다.
지난 8월 해군절 연회에 참석한 김 총비서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항상 '무결점'의 판단을 내려야 하는 북한 최고지도자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이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연회는 리설주 여사와 딸 주애가 자주 등장하는 행사다. 지난 2월8일 조선인민군 창건일(건군절)과 8월 해군절 연회에 초대된 인민군 장령(장성)들과 해군 지휘관들은 김 총비서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단체 사진과는 견줄 수 없는 대우다.
△화려한 연출보다 '극진 대우'에 방점…충성 유도 수단
지난 2021년 '9·9절' 연회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연회는 주로 북한 주재 외국공관의 행사나 외빈 환영 차원에서 열렸다. 이제는 각종 정치 기념일과 일정을 계기로 열리고 있다. 올해만 해도 2월 건군절, 7월 전승절, 8월 해군절, 9월 정권수립일, 그리고 북러 정상회담 성과 축하를 위해 연회가 개최됐다.
화려한 연출에 신경 쓰던 초기와 달리 북한의 연회는 점차 김 총비서가 참석자들에게 독점적으로 베푸는 특별한 '이벤트'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다. 다만 연회가 소수의 사람만 초청된 행사라는 점에서 결국은 군이나 공로자 같은 이미 '검증'을 마친 이들로부터 충성심을 더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의 의미가 더 커 보인다.
yeh2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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