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영화읽기]더 테러 라이브-권력을 테러하다
</figure>'테러'라는 단어는 좀 더 깊이 있는 개념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아무 때나 갖다 붙이게 되면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자기모순'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테러는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폭력도 '방향성'이란 게 분명히 존재한다. 강도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방위가 될 수 있다.
좀 더 스케일을 키워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도 당연히 정당화된다.
테러를 단순히 폭력사용에만 초점을 맞출 때는 후자의 독립운동도 '테러행위'로 쉽게 매도될 수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나 단체들을 대부분 테러집단으로 규정했다. 허나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나 중국 홍구공원에서 일제에 도시락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가 어찌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반작용'은 설령 그 수단이 폭력이라 해도 테러라는 말을 쉽게 갖다 붙이기엔 어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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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요는 '부당한 권력'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이다.
분명한 건 지금은 나라의 존립이 흔들렸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일본제국주의와는 다르게 규정돼야 한다는 점이다.
대세 배우 하정우의 원맨쇼가 돋보이는 <더 테러 라이브>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도 우선 그것에 대한 정의가 필요해 보인다.
보통 입법·행정·사법부를 각각 제1,제2,제3의 권력이라 부르고 언론을 제4의 권력이라 부르지만, 권력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제1,제2,제3의 권력은 사실상 같다. 뭉뚱그려서 소위 '무서운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진 소수의 권력은 모두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그렇다. 그들 권력의 원주인은 국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도 엄연히 권력의 한 주체다.
그럼 이제 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중심으로 새롭게 권력을 구분해보자.
우선 통치권력으로서 입법·행정·사법부가 있고,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해준 국민이란 권력이 있다.
제4의 권력으로 분류됐던 언론은 이젠 제3의 권력으로 소수의 통치권력과 다수의 국민권력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돈이라는 권력도 있지만 논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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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그런데 국민권력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소수의 통치권력을 탄생시킨 모권력으로서 가장 힘이 세지만 뭉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대신 뭉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우리나라 4·19혁명을 떠올려보라.
반면 소수의 통치권력과 언론권력은 늘 권력행사가 가능하다. 하는 일 자체가 바로 권력행사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겐 '의무'가 부여된다. 바로 다수의 '국민'이나 '진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 실제로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말한다.
아무튼 이러한 권력구조 속에서 국민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통치권력이나 언론권력 중 하나만 살아있어도 된다.
통치권력이 제대로 못할 때는 언론권력이 진실보도를 통해 국민들이 뭉치도록 하면 되고, 통치권력이 제대로 하면 언론권력은 나설 필요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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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그런데 만약 소수의 두 권력이 제 역할을 못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즉, 통치권력은 국민을 위하는 척만 하고, 언론권력은 진실을 외면할 때 어떻게 될까.
당연히 국민들은 무시당하고, 권력에 의한 피해자들이 속출하게 된다.
언론이 진실보도를 외면하니 소수의 피해자가 생겨도 국민들은 뭉치지 못할 테고 억울한 일로 피해를 입은 개인은 우울하게 살거나 심할 경우 자살하는 수밖에 더 있을까.
그게 아니면 <더 테러 라이브>의 테러범처럼 죽을 각오로 부당한 권력을 향해 테러를 한번 쯤 가할 수도 있을 않을까.
<더 테러 라이브>는 바로 그 가능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 어쨌든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되기 마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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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그랬거나 말거나 권력의 삼분 구조 속에서 앞서 제시한 장황한 논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부당한 권력이란 바로 '국민을 위하지 않고, 진실을 외면하는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
결코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더 테러 라이브>에서 테러범이 소수의 통치권력과 언론권력에 화가 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적인 재미와 서스펜스로 중무장했지만 <더 테러 라이브>는 사실 엄청난 정치성과 사회비판적인 발톱을 몰래 감추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영화는 방송사에 테러를 가한 범인을 테러범이 아닌 일제강점기 하의 독립운동가로 점점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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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물론 그 배경에는 영화상에 등장하는 소수의 통치권력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지 않고, 언론권력 역시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특히 언론이 진실을 외면하면서 가장 큰 권력인 국민들이 뭉치지를 못한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영화는 국민의 힘으로는 통치권력의 잘못을 바로 잡기 힘들어서 범인이 어쩔 수 없이 테러를 하게 된 것이라 설명한다.
그 지점에서 테러의 대상이 왜 언론을 대표하는 방송국인지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결론은 절망적이다. 아니,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범인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그래서 마지막에 주인공이자 방송국 앵커인 윤영화(하정우)가 빌딩 밖으로 추락하는 범인의 손을 잡은 채 "이런다고 저들은 결코 바뀌지 않아"라는 외침은 그냥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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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더 테러 라이브>는 주인공 윤영화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영화상에서 언론권력이 타락한 근본적인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개인과 조직의 이익이었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테러발생이 어떤 이에게는 특종이 되고, 뺐고 빼앗은 전쟁터에서 타인의 고통은 곧 자신의 행복이 된다.
방송국에서 훤히 보이는 한강다리가 폭파된 뒤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특종을 잡았다는 생각에 오히려 화색이 도는 윤영화의 표정은 압권이다.
그나저나 요즘 한국영화들, 사회성이 너무 짙다.
재미로 관객들을 유도하면서 갖가지 사회현상들에 대한 뼈있는 이야기들을 은근슬쩍 집어넣는다.
<감시자들>이 그랬고, 최근의 <설국열차>나 <감기>, <숨바꼭질> 모두 그러했다.
예술가들이 자꾸만 거짓된 이야기로 현실을 말하려 들 때는 슬픈 일이다. 시절이 수상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 테러 라이브'란 제목에서 '테러'보다는 '라이브'란 단어가 왠지 더 눈에 들어오는 이유다.
7월31일 개봉. 상영시간 98분.
lucas0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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