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영웅'이 살린 제주4·3 생존자, 74년만에 받은 국가보상금 기부
독립유공자 한백흥 지사 손자 한하용씨도 보상금 기부
- 오현지 기자
(제주=뉴스1) 오현지 기자 = 제주4·3 당시 '경찰영웅' 고(故) 문형순 전 서장의 용단으로 목숨을 건진 청년이 70여 년만에 수령한 국가보상금을 문 서장 등 4·3 위인을 기리는데 써달라며 처음으로 기부했다.
18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 국가 사죄의 뜻이 담긴 국가보상금 1000만원을 기부한 강순주씨(90)가 그 주인공이다.
문 전 서장은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재임하던 1950년 8월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거부해 성산포와 모슬포 주민 200여 명을 구한 인물이다. 당시 문 전 서장은 총살 명령서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보냈다.
강씨는 당시 아무런 죄 없이 성산포경찰서에 구금돼 있다 문 전 서장 결정으로 목숨을 건졌다.
강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 풀려날 때 문 서장님이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며 "그 말씀을 따라 바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그 분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 계엄령 치하에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면서까지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해준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냐"며 "아직도 서장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도민과 4·3유족들도 문 전 서장님의 업적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고 눈물을 흘렸다.
문 전 서장의 업적 발굴을 위해 힘써온 강씨는 2018년 10월 73주년 경찰의날 기념식에서 문 전 서장을 대신해 '영웅증'을 대리 수상했고, 같은해 11월 제주경찰청에서 열린 문 서장의 추모흉상 제막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강씨는 추도사를 통해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니었다면 하늘나라에 계신 저희 부모님께서도 편하게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라며 "4·3이 재조명되면서 70년이 지난 지금에야 당신의 업적을 인정받게 됐으니 늦었지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했다.
강씨는 지금도 1년에 수차례 후손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한 문 전 서장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묘역을 정비해오고 있다.
몸이 불편한 강씨 대신 이날 4·3희생자유족회 사무실에서 열린 기부금 전달식을 찾은 아들 경돈씨는 "아버지가 기부금 1000만원을 문 전 서장님 등 4·3 의인들을 기리는 데 사용해달라고 말하셨다"며 "문 전 서장의 정신을 기리고,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한백흥 지사의 손자인 한하용씨(76)도 이날 본인 몫의 국가보상금을 유족회에 기부하며 기부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 지사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제주에서 조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 지사는 함덕리장으로 있던 1948년 11월 토벌대의 청소년과 청년 집단 학살을 만류하다 폭도로 몰려 희생됐다.
한씨는 "사실 내 돈이 아니라 4·3 때 희생되신 할아버지의 돈"이라며 "손자가 이렇게 기부하는 걸 하늘에서 보시고 기뻐하실 거라 믿는다"고 웃어보였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2018년 독립유공자로 비로소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4·3이 해결됐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며 "앞으로 기부금이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 4·3 아픔에 대한 치유에 사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 뿐 아니라 국가보상금을 빠른 시일 내에 기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온 유족들도 잇따르고 있다.
기부금을 운용할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빠른 시일 내에 민간 재단을 설립해 환경 조성에 나설 계획이다.
오임종 유족회장은 "4·3의 미래와 화해, 상생을 위해 보상금을 써달라는 두분이 오늘 처음으로 나왔다"며 "재단 설립을 위한 간담회를 곧 마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빠른 시일 내에 재단을 설립하겠다. 생존희생자와 유족들의 소중하고 큰 뜻을 제대로 받들겠다"고 밝혔다.
한편 제주도는 지난 7일부터 보상금 지급이 결정된 생존희생자·유족 등 총 300명에게 1인당 최대 9000만원의 국가보상금을 지급했다. 정부는 오는 2026년까지 4·3 희생자 1만101명에게 총 9050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ohoh@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