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관 아리셀 대표 등 첫 재판 '공전'…4개월 기다린 유족 오열

"검찰 수사기록 열람·등사 못했다"…내달 준비기일 속행

박순관 아리셀 대표(왼쪽)와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 2024.8.28/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수원=뉴스1) 김기현 기자 = 23명이 숨진 대형 화재 사고와 관련해 구속 기소된 아리셀 박순관 대표와 그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 등에 대한 첫 공판이 '수사 기록 열람·등사 지연'을 사유로 공전했다.

재판부는 '검찰 인적·물적 자원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추후 기일을 약 1달 후로 지정했고, 유족들은 "피고인들이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수원지법 형사14부(고권홍 부장판사)는 21일 오후 박 대표 등의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등 위반 사건 1차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공판준비기일은 본격적인 재판을 앞두고 범죄 혐의에 대한 피고인 입장을 확인하고 증거 조사를 계획하는 절차다.

일반 공판 기일과 달리 공판준비기일엔 피고인에게 출석 의무가 부여되지 않아 박 대표 등은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날 재판은 10여 분 만에 종료됐다. 변호인 측이 검찰 수사 기록을 아직 열람·등사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박 대표 변호인은 "수원지검 열람실 사정으로 오는 30일부터 수사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며 "현재 증거 목록만 받아 둔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에 재판부는 검찰에 신속한 재판 진행을 위해 인적·물적 부족 문제 서둘러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근 검찰 사건 기록 열람·등사 문제로 주요 사건별로 평균 1달 넘게 재판이 지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순관 아리셀 대표와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이 지난 8월28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후 대기 장소인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남부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2024.8.28/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재판부는 "해당 사건 외에도 피고인과 변호인이 수사 기록을 열람·복사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재판이 1달에서 1달 반 정도 지연되고 있다"며 "상식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변호인이 신속히 수사 기록을 열람·복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박 대표 변호인을 향해 "대략적으로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박 대표 변호인은 "법리적인 평과 판단을 구하는 부분이 있다"며 "수사 기록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입장을 밝히기엔 부적절하다"고 말을 아꼈다.

재판부는 다음 달 25일 재차 공판준비기일을 열어 증거 조사 및 증인 채택 여부 등 심리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다만 검찰 수사 기록 분량이 약 3만 5000쪽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음 기일이 차질 없이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검찰은 앞으로 △박 대표가 아리셀 경영책임자에 해당하는지 여부 △화재 원인이 된 전지 보관 관리상 주의 의무 및 안전 조치 의무 위반과 근로자 사상 사이 인과관계 등을 중점적으로 입증한다는 계획이다.

유족 10여 명은 재판 종료 후 수원지법 정문 앞 인도에 모여 오열하며 재판이 공전한 데 대해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피해자 중 1명인 고(故) 엄정정 씨 어머니 이순희 씨는 "진짜 억울하고 분하고 미치겠다"며 "벌써 4개월, 120일이 지났는데 여태 재판 준비도 못 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이어 "우린 하루하루가 피 마르고, 눈물 없으면 살지도 못 하고 있다"며 "희생자가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 나오겠느냐. 판사고 변호사고 진짜 밉다"고 오열했다.

21일 오후 '화성 아리셀 화재' 희생자 유족들이 박순관 대표 등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 1차 공판준비기일이 종료된 뒤 수원지법 정문 앞 인도에 모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2024.10.21/뉴스1 ⓒNews1 김기현 기자

박 대표는 지난 6월 24일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리튬전지 제조공장 아리셀에서 발생한 화재로 근로자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유해·위험요인 점검을 이행하지 않고, 중대재해 발생 대비 매뉴얼을 구비하지 않는 등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조사됐다.

박 본부장 등은 발열감지 모니터링 미흡 등 전지 보관 및 관리와 화재 대비 교육 및 소방훈련 미실시 등 안전 관리상 주의 의무를 위반한 혐의다.

특히 아리셀은 2020년 5월 사업 시작 후 매년 적자가 나자 무허가 파견업체 소속 비숙련 외국인 근로자 320명을 생산 공정에 교육 없이 즉시 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매출을 높이기 위해 기술력 없이 노동력만 집중적으로 투입해 무리하게 생산을 감행했다는 게 검찰 설명이다.

검찰은 또 아리셀이 생산 편의를 위해 방화구획을 철거하고, 대피 경로에 가벽을 설치하는 등 구조를 임의로 변경하면서 피해를 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별개로 박 본부장 등은 2021년부터 올해 2월까지 국방기술품질원 품질검사를 통과하고자 검사용 시료를 몰래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데이터를 조작해 47억 원치 전지를 군납한 혐의도 받고 있다.

아리셀 모회사인 에스코넥 역시 2017∼2018년 국방부에 전지를 납품할 당시 시험데이터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군 품질검사를 통과한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에스코넥 대표는 박 대표가 겸임하고 있다.

kk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