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판잣집서 경기지사 '역전 드라마' 쓴 김동연의 가능성은?
13년 전 기재부서 첫 ‘유쾌한 반란’…‘남이 하고 싶은 일 내 일로 착각’
킹핀 ‘승자독식구조’ 깨기 위해 정치…“경기도·한국 바꿨으면 좋겠다”
- 진현권 기자
(수원=뉴스1) 진현권 기자 = "'지금의 이 잘못된 나라를 완전히 뒤집어서 새롭게 만들자', 정약용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묘비에 경세유표를 쓴 이유를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이 다섯 글자로 요약했다"
"경기도가 한번 바꿨으면 좋겠다. 바꿔봤으면 좋겠다. 함께 유쾌한 반란을 일으키자고 동의해주신다면 기꺼이 이 반란의 수괴가 되겠다."
◇대역전극 도백 오른 김동연, '유쾌한 반란'으로 새로운 도전
2022년 6월2일 새벽 대역전극을 통해 도백(道伯)에 오른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취임 이후 늘 강조해온 말이다. 그러나 '유쾌한 반란'이란 용어는 그가 13년전인 2010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때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기재부 예산실은 사무관의 85%가 고시출신이어서 그 어떤 조직보다 '하이라키'(계층)가 강한 조직이다. 그런 조직 분위기에서 그는 무엇인가 뒤집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정부 고위 공무원으로 반란이란 용어를 쓰는 것이 불편하게 들릴 수 있어서 앞에 '유쾌한'을 붙였다 한다.
즉 '유쾌한 반란'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 뒤집기'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그의 인생 철학이 지난해 경기도지사 승리로 이어지면서 경기도에서 '유쾌한 반란'의 실험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는 지난 18일 경기도청 대강당에서 열린 '2023 기회경기 공감 워크숍'에서 '유쾌한 반란'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그는 이날 특강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쌓였던 성장과정과 대선주자로 나서게 되었던 인생철학을 자세하게 풀어냈다.
그는 1967년 11살 되던 해 사업가이던 아버지가 서른셋의 나이에 아내와 네 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소년 가장이 되었다. 이후 1968년 서울 청계천 무허가 판잣촌에서 살았고, 판잣촌 마저 도시정비사업으로 헐리면서 경기도 광주대단지(현재 성남시)로 강제 이주돼 한동안 천막을 치고 살았다. 천막살이는 고등학교 초반까지 계속됐다.
그는 "그곳에서 저희 6식구는 아주 어렵게 살았고, 끼니 걱정을 했다. 제대로 먹지 못했다"며 "그래서 저는 인문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상업학교(덕수상고)에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고 3 때 시험을 봐 취업전선(한국신탁은행-현 하나은행)에 뛰어들었다. 만 나이로 17살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배움에 대한 타오르는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1977년 야간대학(국제대-현 서경대)에 진학을 했다. 그는 다니는 직장(서울 성북구)의 독신자 합숙소에서 직장 선배인 서울법대 나온 선배와 친해졌다. 어느날 그 선배 방에서 얘기를 끝내고 나오면서 쓰레기통에 열댓권의 책이 버려져 있는 것을 봤고, 그 중 한권을 집어들어 방에 와서 펴보니 고시잡지였다고 했다.
그래서 낮엔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녁엔 야간대학을 다니고, 깊은 밤 새벽까지 고시공부를 했다. 죽어라 공부해 대학 졸업하던 1982년 제26회 행정고시 및 제6회 입법고시 등 2개 시험에 합격했다. 그렇게 그는 나를 둘러싼 환경을 깨는 첫 반란을 일으켰다.
1983년 기획재정부에 동료 3명과 함께 발령을 받았다.그런데 첫 출근 하던 날 각 방(부서)을 돌면서 인사하던 중 한 중참 사무관이 "학교 어디 나왔냐"고 물었고, 각자 돌아가면서 어느 학교 나왔다고 얘기한 뒤 방을 나갔다. 그런데 뒤에서 "요새 별 희한한 학교 나온…(여기까지 왔네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가슴이 무너졌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그 부처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제가 25살때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이 조직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했고, 공부를 더 하자고 결심했다. 그 때 가방끈을 길게할 수 있는 방법은 유학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뒤 죽기살기로 일했고, 공부했다. 죽을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이렇게 살수 없다' 익숙함과의 결별
운좋게 미국 미시간대학교 국비유학생에 선발이 됐고, 더 운좋게 같은 해에 미국 정부가 주는 풀브라이트 장학금도 받게됐다. 국비유학생은 2년 석사과정이었고, 플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박사과정까지 하게됐다. 또 미시간대학교에서 학교장학금까지 받았다.
열심히 공부했다. 첫 두학기 동안 수강한 과목 모두 A학점을 받았다. 그런데 세번째 학기부터 엄청난 회의가 몰려왔다. '내가 왜 공부 하는 것인가', 고민해 봤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가장 단순한 답은 박사를 받기 위해서였는데 답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답을 찾지 못하고 살아온 인생을 돌아봤다고 한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과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지, 아니면 남이 하고 싶은 일, 내 주위나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하면 좋다고 하는 길을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이 들었다"며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그렇다' 였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그 때부터 익숙한 것들과 결별을 했다. 학기 초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만 택했다. 그러나 학기가 다 끝나면 머릿속에 남은 건 없고, 성적표에 찍힌 성적만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기로 했다.
다음 학기부터 한국학생들이 성적이 잘 안 나와 다 피하는 세미나 과목을 4과목 중 2과목을 수강했다.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 때부터 그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했다. 그렇게 그는 피나는 노력끝에 1993년 6월 3년9개월만에 미시간대학교 공공정책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이런 결심과 사회를 뒤집는 반란은 공직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2012년 기재부 차관으로 일할 때 강원도 조그만 시골학교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다. 이 학교의 수학선생님이 편지를 보냈는데 "언론을 보니 차관님이 힘든 환경을 딛고 '자수성가'하셨다는데, 우리 학교 한번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편지내용을 놓고 교육예산과정을 불러 의견을 물었는데 "가시면 안된다. 100명 미만인 학교는 통·폐합 대상인 학교인데, 기재부 차관이 거기 가는 것은…"이라며 반대했다. 그래서 학교에 얘기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비서관 1명만 데리고 갔다.
그는 중학교 1·2학년 학생들에게 줄 서로 다른 책 스물한권을 사서 이름을 다 써주고 학용품을 샀다. 그는 "가는 차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해줄 까' 고민 하다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 천막집,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갔던 상업학교 얘기를 해줬다. 학생 스물한명이 다 왔는데 그 중 반이 울더라, 그 학교 교장 포함해서 교사가 8명 계셨는데, 교사들도 다 우시더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좋은 얘기를 해준 것에 뿌듯한 마음이 한편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엔 무거운 바위가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 학생들이 꿈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게 될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인가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대학 진학, 부모의 직업과 자녀의 평생 소득함수 관계가 관련돼 계층 사다리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승자독식구조 깨기 정치 시작 김동연, 경기도 넘어 대한민국으로
그래서 그는 공직생활을 끝내고 아주대총장으로 재임하면서 계층사다리 문제 해결을 위한 실험을 했다. '에프터유(After you)'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어려운 학생 150명을 뽑아 방학 동안 5개 대학교(미국 3개, 중국 2개)에 연수보냈다. 타교 학생 30명(20%)도 포함시켰다. 계층이동사다리가 학교 울타리밖으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다.
프로그램은 대성공이었다. 연수에 참여한 교수도 "타교 학생 보내길 잘했다"며 동의했다. 학생들도 "두려움도 새로워서 좋았다, 열심히 하겠다, 우물밖 개구리가 되겠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며 눈빛이 달라져 돌아왔다. 잘못된 사회를 뒤집는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유쾌한 반란은 경기도청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문제는 국가주도적인 성장정책에 의한 사회 곳곳에서의 '공공과 국가의 과잉', 양극화와 소득 불균형과 계층 이동사다리 끊긴 것 같은 '격차 과잉', 우리 사회의 갈등의 깊이가 점점 더해가는 '불신과잉'으로 요약할 수 있다"며 "그것을 깨트릴 킹핀(10개의 핀 중 건드리면 전체가 쓰러지는 스트라이크날 가능성 많은 5번째 핀)이 여러가지가 있을텐데 저는 우리사회의 '승자독식 구조'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1표만 얻어도 모든 걸 갖는 '다수 소선거구제', 제왕적 대통령이 나올 수밖에 없는 '5년 단임 대통령제', 시장에서의 '독점과 불공정 문제' 등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승자독식 구조를 깨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재작년 8월 정치에 입문한 정치 초짜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절박감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사회 이대로 가선 안되겠다. 이 판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래서 대선에 출마했다"고 했다.
그는 비록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와의 단일화로 대선 완주를 하진 못했지만 지난해 6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대역전극을 연출하며 1400만명 도민의 선택을 받았다.
취임 6개월만에 경기도청 곳곳에서 변화 바람이 불고 있다.
'엄마찬스' '아빠찬스'를 깨기 위한 '경기찬스'(경기청년 사다리 프로그램 운영(올해 19억2000여만원), 청년 갭이어 프로그램 운영(41억4000만원) 등)와 스타트업 창업 육성 프로젝트(스타트업 펀드조성(50억원), 스케일업 펀드조성(50억원) 등) 등 김동연표 '청년기회 사다리정책'이 본궤도에 오르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 조직개편(미래성장국, 청년기획과, 배이부부머기회과 등 신설)도 끝냈다. 최근에는 '실국장, 과장, 팀장급 기회경기 공감 워크숍'을 갖고 다양한 아이디어도 발굴했다.
그의 이런 '유쾌한 반란'이 경기도를 넘어 대한민국으로 확산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jhk102010@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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