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18 계엄군 핵심 지휘관 유언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광주교도소 투입 3공수 12대대장 출신…'광주 명예회복' 강조
특전사회 광주 사죄방문 계기로…진상조사위 차원 조사 필요
- 최성국 기자, 이수민 기자
(광주=뉴스1) 최성국 이수민 기자 = 1980년 5월 광주진압작전의 핵심 지휘관인 고 김완배 준장(5·18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장)의 유언이 최초로 공개됐다.
김 준장의 유언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광주시민이 폭도가 아니었다'는 내용으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차원의 적극적인 조사가 요구된다.
또 43년 만에 특전사회의 공식적인 광주 첫 방문을 이끌어낸 계기가 돼 아직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계엄군들의 고백을 유도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임성록 대한민국 특전사회 광주지부 고문은 23일 <뉴스1>과 단독 인터뷰에서 "최근 5·18단체와의 '대국민 선포식'에 특전사회가 참석한 이유는 김완배 장군의 마지막 유언 중 하나가 '광주의 명예회복'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준장은 1980년 5월 당시 광주 시위진압작전에 투입됐던 특전사령부 예하 제3공수여단 제12대대장이다.
그는 지난 1994년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서울지검에 고소됐던 광주 진압부대 지휘관 35명(전두환 등)에 포함되는 계엄군 핵심 인물이다.
김 준장(당시 중령)이 지휘한 3공수여단 12대대는 1980년 5월20일 새벽 광주역에 도착해 전남대학교 등에서 시위 진압에 참여했고 광주교도소 방어작전 등에 투입됐다.
그는 육군본부가 발간한 '역사자료'에 5·18작전 참여 체험기를 싣기도 했고, 5·18특별법에 의해 수사가 진행됐을 때 청문회에 참석하거나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광주 출신으로 길을 잘 알아 작전에 투입됐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광주 출신인 그는 다른 계엄군 핵심 지휘관들처럼 '5월 광주'의 진실을 털어놓지 않고 계엄군이 유혈 진압한 광주시민들을 폭도라고 호칭했다.
생전에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폭도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차량으로 돌진해 격퇴했다. 국가를 혼란에서 건졌다고 자부한다"며 "우리 계엄군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무법과 폭력이 난무해, 교도소가 폭파되고 사상범과 범죄자들이 날뛰었을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밖에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언급하거나 활동한 적은 없다. 전역 후 유족 등을 찾아 얼굴을 드러내거나 사죄하지도 않았다. 친구 등 주변인에게도 광주나 오월에 관한 이야기도 일체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 그가 죽기 전 '5·18'을 떠올리고 유언으로 남긴 것은 삶의 마지막에 비로소 나온 '양심고백'으로 추측된다.
김 준장은 지난 2016년 자택에서 중상을 입어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병상을 찾은 후배 임성록 고문에게 유언을 남기고 같은해 12월31일 숨졌다.
임 고문은 "누워 있는 장군님이 가까이 와보라고 하더니 '광주의 명예를 회복시켜라. 당시 사람들은 빨갱이나 폭도가 아니다. 그리고 특전사의 명예도 지켜줘라. (그러기 위해)광주에 있는 시민단체와 만나볼 방법을 찾고 실행에 옮겨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김 준장의 아내 역시 임 고문과 병실에서 유언을 같이 듣고 "큰 일을 하셔야겠다. 금전적 도움이든 뭐든 돕겠다"고 말했다.
임 고문은 "유언을 지키기 위해 수년간 믿을 수 있을 만한 5·18 관계자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만난 게 황일봉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장이다. 몇 차례 만남 이후 '대국민 선포식'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실제 추진했다"며 "정치적 의도를 가진 행사가 아니다. 존경하는 김완배 장군 뜻을 받들어 선배, 동료의 잘못을 사죄하러 왔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행사에 참석한 180여명의 전직 특전사들도 전부 자발적으로 행사 참여에 지원했다. 이들 중에는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있었던 5명도 포함됐다.
임성록 고문은 "또 김 장군님 유언의 일환으로 국립 5·18민주묘지에 군복을 입고 참배했던 것"이라며 "군복을 입은 것은 상징적인 의미다. 사복을 입고 참배하는 것보다 군복을 입고 그때 그 군인의 모습으로, 우리 특전사가 오월영령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참배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관리소장이 '검은 베레모'를 벗으라고 하길래 바로 벗었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논란이 된 '검은 베레모'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며 "우리는 그만큼 5·18, 광주시민과 함께하고 사과하고자 하는 마음에 진심이다"고 강조했다.
또 "행사를 마친 후 김 장군님이 안장된 대전 현충원에 가 '화해와 용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시작이 열렸다'고 보고도 드리고 왔다"고 설명했다.
한편 3년째를 맞은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상향식 조사 방식으로 2100여명의 계엄군으로부터 5·18 관련 진술을 확인·확보했다. 신군부 핵심인사들로부터의 유의미한 진술과 조사내용은 아직까지 외부로 밝힌 바 없다.
5·18기념재단 연구소 관계자는 "다방면에서 계엄군과 만나본 경험상 1980년 당시 본인들이 광주에 왔던 상황을 설명하는 등 단편적인 진술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조사위가 많은 계엄군을 조사했지만 진실을 꺼낸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3공수와 11공수 등 특전사 출신들은 그동안 5·18을 금기어로 삼고 살아왔다. 공수부대는 지대장 체제로 대대장부터 지휘관급으로 판단된다"면서 "지휘관급이 5·18과 관련된 양심고백을 했다면 5·18진상규명위원회 차원의 조사와 사실 규명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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