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유엔참전국⑬] 남아공, 하늘을 휘저은 ‘창공의 치타’
테론 중령 필두로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 파병
장교 49명 포함 206명, 총 1만2405회 공중 출격
- 강승우 기자
(부산=뉴스1) 강승우 기자 = 6.25전쟁 발발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한민국과 외교 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았으나, 집단안보체제 유지라는 대의 아래 참전을 결정했다.
남아공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 결의안이 결정되자 즉시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7월1일 해외 파병 합법화를 위한 긴급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투부대 파병 결정 이후 자원자를 모집해 최종적으로 제2전투비행대대가 한국으로의 파병을 준비하게 된다.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공군만을 지원한 남아공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창공의 치타’라는 별명으로 제2전투비행대대의 용맹성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6.25전쟁 참전을 위해 3500시간 이상의 비행경력을 가진 테론 중령이 대대장으로 임명된 비행대대는 206명의 공군 병력으로 꾸려졌다.
이들은 49명의 장교와 157명의 부사관 및 병사로 구성됐으며, 각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더반항을 출발해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요코하마에서 예정된 F-51 무스탕기와 다양한 장비를 인수한 비행대대는 미 제6002전술지원비행단에서 제반 사항 설명을 듣고 현지 적응훈련을 시작했다.
장교 13명을 포함한 34명의 선발대를 편성해 미 공군 수송편으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베이스캠프를 옮기고 본격적인 전투에 참여한다.
이를 시작으로 평양, 수원, 진해, 여의도, 횡성, 오산 등 최전방 기지에 배치돼 후방차단, 지상군 근접지원, 전략폭격 작전, 적 보급로 차단 등의 다양한 작전에 투입된다.
이들이 수행한 수많은 임무 중 이들의 전공을 가장 크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해안 지역의 적 화차를 공격해 지역을 차단하는 임무 수행이었다.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대략 75일간 비행대대는 총 868회의 비행 출격을 이어갔고, 총 1984시간이 넘게 동해안 상공을 휘저었다.
이 출격 횟수와 비행시간은 산술적으로 비행대대의 공군기가 한번 출격하면 최소 2시간 이상 매일 비행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들의 전투는 신의주비행장 폭격과 청천강 북쪽 초계비행을 마지막으로 정전협정이 이뤄지고 한국에서의 6.25전쟁 임무가 종료된다.
이후 비행대대는 교육훈련에 매진하다가 9월 초부터 장병 14명으로 구성된 1진이 귀국했고, 9월22일에는 제2진이 미 수송기 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마지막 제3진이 10월 말에 귀국하기로 확정됨에 따라 10월1일부터 모든 훈련을 종료하고 10월29일 잔류인원 전체가 오산비행장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남아공 공군은 전쟁 동안 연 95대의 F-51 무스탕 전투기와 20대의 F86 전투기를 운용해 총 1만2405회 출격했다.
그리고 전차 44대와 야포 221문, 대공포 147문, 보급품 등 각종 건물과 집적소 500여개소 등을 파괴하며 유엔군의 공중전을 지원했다.
집단안보체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공군 지원으로 그 역할을 다한 남아공은 총 11회의 대한민국 무공훈장과 미국 은성훈장 2회를 비롯해 각종 훈장을 수여 받으며 자신들의 헌신을 증명했다.
lordlyka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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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 22개국에서 195만7733명이 참전했다.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활약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은 유엔평화기념관과 함께 올해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해 한달에 한번 총 21회에 걸친 ‘이달의 유엔참전국’ 연재를 통해 유엔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활약상을 조명하고 기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