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만개의 부처' 하얀바위 기도하듯…땅끝이 예구나
달마산 종주·달마고도 13.7㎞…암릉과 땅끝 은빛 바다 '작은 설악'
거칠고 빡센 능선 바윗길…'고독한 유토피아' 도솔암 앞에선 경외감이
- 신용석 기자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우리나라 육지의 땅끝과 다도해를 굽어보며, 멀리 중국을 내다보는 달마산을 간다. 왜 이름이 달마산일까? 달마(dharma/達磨)는 인도의 스님으로 중국에서 선종(禪宗)을 창시한 혁신적인 인물이다. 선종은 참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을 중시한다. 달마산은, 인도에서 경전이 전해진 미황사의 창건설화와 관련하여, 달마대사의 가르침이 면면히 전해진 산이라는 이름으로 보인다.
달마대사를 생각하면 우선 그의 초상화가 떠오른다. 커다란 왕눈, 뭉툭한 코, 텁수룩한 수염이 무서운 인상이다. 본래 핸섬한 미남이었으나 다른 못생긴 사람의 모습과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공부를 하다 졸음을 쫓기 위해 ‘무거운’ 눈꺼풀을 잘라내서 왕눈이다. 달마대사의 초상화를 집안에 걸어두면 복이 온다고 해서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달마도가 있다.
달마산(489m)은 높지 않고 넓지 않지만, 도달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산의 마지막 오르막에선 용을 써야 하는데, 달마산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산이다. 힘을 모아 올라서면, 거기에 만 개의 부처라는 하얀 바위들이 기도하듯 암릉을 이루고 있고, 거기서 국토 땅끝의 초록빛 논과 밭, 은빛 바다와 검은빛 섬들을 내려다 본다. 누구나 시야가 확 넓어지고 가슴이 뻥 뚫린다. 엄청 높은 산에 올라온 느낌을 받는다.
달마산은 아는 사람들만 드물게 다니던 산이었으나, 미황사 금강스님이 호미와 곡괭이만으로 달마고도(達磨古道)라는 이름의 둘레길을 개통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갖게 되었다. 달마산 산행은 둘레길(17.7㎞), 산 마루금을 걷는 남북 종주길(12~15㎞), 미황사와 달마봉을 둘러보는 짧은 길(3~4㎞) 등 여러 코스가 있다. 기자는 둘레길 1구간-종주능선-둘레길 4구간을 거쳐 미황사로 돌아오는 코스를 나선다.
◇ 미황사-둘레길 1구간-달마봉 5.7㎞ "거친 바위너덜에서 장엄한 다도해 일출 조망"
전날 자정에 서울을 떠난 산악회 버스가 새벽 5시에 미황사에 도착한다. 산사의 새벽공기를 한 모금 흡입하니, 곧바로 이 여행을 잘 왔다는 몸신호가 온다. 일주문 지나 돌계단 올라 천왕문에 이르니, 왼쪽으로 달마고도의 시작점을 알리는 큰 안내판과 스티커 함이 있다. 천왕문 안마당으로 발소리 죽여서 살짝 들어서니, 컴컴한 절집들 뒤로 달마산이 절을 호위하듯 서있는 산마루의 윤곽이 뚜렷하다. 그 위로 시퍼런 우주에 뿌려진 별들이 반짝반짝 총총하다.
새벽의 숲은 검고, 바다에서 몰려든 세찬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흔들어댄다. 플래시를 켜고 컴컴한 숲길을 가다가, 시멘트 임도길을 잠깐 만나고,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윙윙대는 바람소리 사이에 짹짹하는 새소리가 섞이며, 드디어 사방이 확 트인 너덜길이 나온다.
너덜길은 달마고도의 아이콘이다. 너덜겅이라고도 하는데, 이 너덜들은 오랜 세월 동안 바위가 얼었다 녹으면서 쪼개지고 부서져 생긴 파편이다. 물처럼 흘러내린 너덜들이 어디서 왔는지 고개를 드니, 거기 너덜들의 엄마인 하얀 바위봉우리들이 그림처럼 솟아있다. 자식들의 행로를 바라보며.
출발한지 45분만에 달마고도 1구간의 종점인 큰바람재에 도착한다. 바람은 더 커져 나무들이 휘청거린다. 일행들은 모두 2구간으로 사라지고, 달마산 정상까지 3㎞라는 화살표 방향의 수풀로 들어선다. 바람 몰아치는 새벽의 산길을 혼자 들어서니 좀 으스스하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풀을 헤치고 나가니, 바위무더기와 바위벽을 타고 넘는 거친 오르막이 계속된다. 바위너덜을 처음 오를 때는 재미있지만, 계속되면 계단 2칸을 단번에 계속 오르는 것처럼 힘이 부친다.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뒹구는 오르막에서는 정확한 길을 찾기 어렵다. 본능적으로 위로 위로 뾰족한 바위봉우리를 올라갔으나 내려설 길이 없어 당황한다. 알바(길을 잘못 감)를 한 것이다.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 올라설 때는 45도 각도로 보이던 벼랑이 내려설 때는 90도로 느껴진다. 땀이 쪽 빠지고 기운도 쪽 빠진다.
기운을 돋구는 것은 황홀한 일출 풍경이다. 바다 끝을 붉게 물들이며 검은 섬과 회색 갯벌 위로 떠오르는 여명의 빛이 찬란하다. 빛이 하늘에 퍼지고 땅끝을 통과해 육지로 들어가는 ‘색깔의 이동’이 순식간이다. 빛의 온도가 전해져, 바람은 세차지만 온도는 미지근해졌다.
달마봉 정상까지는 잠깐 잠깐의 ‘바위 내리막’과 짧은 안부(鞍部/움푹한 능선)를 제외하면 거의 '바위 오르막'이다. 쭉쭉 치고 나가기 어렵고, 속도는 붙지 않는다. 3㎞ 암릉을 2시간 가까이 헤매면서, 두 개의 큰 바위봉우리를 넘어, 드디어 달마봉 정상의 돌무더기 탑을 만난다.
달마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360도 조망은 과연 '작은 설악산'답다. 설악산 대청봉에 선 것처럼 은빛 바다가 호수처럼 깔려 수많은 섬들이 정박해 있고, 가야할 암릉이 '아기 공룡'의 척추처럼 하얗게 늘어서 있다. 예전에 왜구의 동태를 살피던 봉화대에서 불을 피웠기 때문에 불썬봉으로 불렀다고 하듯이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배 한척, 갈매기 한 마리도 선명하게 보인다.
◇ 달마봉-도솔암-미황사 8㎞ "아기공룡길 넘어, 벼랑끝 도솔암에 감탄, 달마고도에서 힐링"
가야할 도솔암까지 5.2㎞의 끝은 여기서 고도차이가 100m이내이니, 휘파람 불며 슬슬 가면 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공룡의 척추같고, 용과 범의 어금니같다고 했다. 깊이 패인 내리막과 높게 솟은 오르막을 십여 차례 오르내리는 바위길이다. 급경사 바위면에 설치된 로프를 잡아당기며 재미있어 했지만, 이후에 로프가 계속 등장하면서 팔 힘을 빼고, 이따금 나타나는 단 높은 계단은 다리 힘을 뺀다. 1시간쯤 걸려 도착한 대밭삼거리의 이정표에 이제 겨우 1.2㎞ 왔다는 숫자가 박혀있어 더욱 힘이 빠진다.
대밭(산죽)이 울창한 흙길, 급경사 바위길, 로프와 계단을 지나 하숙골재에 이른다. 달마산에서 2.3㎞ 지점이니 이제 중간쯤 왔다. 조금 더 가니, 오른쪽의 이정표를 믿어야 할지, 왼쪽에 겹겹이 매달린 산악회리본을 믿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리본을 따른다. 암봉의 마루금을 관통하는 빡센 루트다.
이 코스에서도 힘을 주는 것은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른쪽엔 진도, 왼쪽엔 완도가 마치 항공모함처럼 수많은 섬들을 거느리며 계속 따라온다. 하늘의 절반엔 먹구름이 낮게 내려왔고, 그 밑으로 뿌연 대기가 비를 몰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뾰족한 능선에는 하얀 바위들이 여기저기 조각이 되고 탑을 쌓고 성을 이었다.
떡 모양의 네모난 돌들이 있는 떡봉에 올라, 지나온 기다란 암릉을 돌아본다. 오늘 바위를 딛고, 부여잡고, 휘돌고, 낑궈서 통과하고, 매달리고, 기어오르고, 미끄럼 타고, 미끄러지고, 부딪히고, 긁히고, 쳐다보고, 감탄하고…바위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덕분에 벌써 무릎과 발목이 시큰시큰하다.
떡봉에서 도솔암까지 1.6㎞도 쉽진 않지만, 지나온 길에 비하면 점차 순해진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원추리, 나리꽃, 패랭이꽃, 돌양지꽃, 맥문동 등의 야생화에 눈길을 주고, 바람에 시달리는 소사나무, 예덕나무, 팥배나무에게도 고생한다는 인사를 해본다.
이게 마지막 로프일거야! 라고 확신하며 마지막 힘을 모아 작은 바위언덕에 오르고, 한참 더 가서 나무터널을 통과하니, 도솔암이라고 쓰여있는 화살표가 등장한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니, 두 개의 바위꼭대기 틈에 옆모습을 낸 쪼그만 암자가 나타난다.
도솔(兜率)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불교의 이상향이다. 과거의 부처가 머물렀고, 미래의 부처가 머무는 곳이다. 그렇듯, 절벽 위 손바닥만한 단칸방 암자에 엄청난 기운이 서려있음을 느낀다. 창연한 하늘 밑, 공중에 뜬 벼랑과 도솔암이 그려낸 풍경의 아우라 앞에서 깊은 경외감을 느낀다.
도솔암에서 급경사길을 조심조심 10분쯤 내려오니 달마고도 둘레길의 4구간과 만나는 삼나무숲이다. 얼마만에 만나는 푹신한 흙길인가! 반가워하며 피톤치드가 뿜뿜한 숲길을 걷는다. 이제 종점인 미황사까지는 불과 3.7㎞다. 단숨에 달려가고 싶으나 이미 에너지가 소진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게 달마산이다. 어디서나 천천히, 느리게, 돌아보며 가게 만든다.
거대한 너덜겅을 통과해서 숲길로 접어드니, 고맙게도 산행의 끝머리에 빗줄기가 굵어진다. 컴컴한 숲에서 존재감 없던 낙엽들이 빗물에 아른아른 반짝인다. 낙엽도 살려내는 빗물이다. 너른 임도를 거쳐 이제 미황사 경내로 들어선다. 새벽 5시에 시작한 걸음을 정오 12시 반에 마친다.
절 위치를 정해준 소의 음메~소리가 아름다웠고(美), 그곳에 절을 지으라고 게시한 사람에게 금빛(黃)이 나서 미황사(美黃寺)라 했다. 유흥준 교수는 이렇게 썼다. "미황사 대웅전 축대 한쪽에 걸터앉아 멀리 어란포에서 불어오는 서풍을 마주하고 장엄한 낙조를 바라볼 수 있다면 답사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 대웅전은 현재 거대한 가설건물에 싸여, 전각을 모두 해체해서 다시 짜맞추는 '1000일의 휴식'을 하고 있다. 대웅전의 휴식보다 더 아쉬운 것은 찻집의 휴식이다. 뜨거운 매실차로 몸을 녹여주고 향을 들여주던 선다원(禪茶苑)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여러 생각에 젖는다.
미황사에 전각이 많지만, 군데군데 조그만 소품들에 더 많은 눈길이 간다. 흐트러지거나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번 더 보게 된다. 미황사의 템플스테이는 우라나라는 물론 국제적으로 소문이 많이 났다. 종교와는 무관한 힐링 프로그램이다. 미황사 홈페이지에 이렇게 초대의 글을 써놓았다. "아름다운 섬들이 둘러져 있는 호수같은 바다, 산수화 그림속 같은 달마산, 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다다른 절…마음이 고요해지고 자유로와지는 발걸음의 시작."
국토 육지의 남쪽 끝산, 달마산은 특별한 산이다. 힘을 다 쓰게 하고, 속도를 내지 못하게 한다. 천천히 느리게 걸으며 자신을 다독거리는 길이 거기에 있다. 산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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