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방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누구인가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첫 남미출신 카톨릭 수장으로
예수회 소속…청빈하고 겸손한 생활로 신망얻어
교리에는 보수적, 사회문제엔 진보적

(서울=뉴스1) 박태정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 © AFP=News1

</figure>지난해 3월 제266대 교황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12월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가정의 5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같은 출신배경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전임 교황들과는 달리 진정한 '노동자 계층'의 교황이 탄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로 77세를 맞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상 첫 남미 출신 교황이면서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기 헌신적인 생활태도를 강조하는 카톨릭 수도회 '예수회(Jesuits)' 출신 첫 교황이기도 하다.

그는 대주교로서 모국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를 이끌면서도 시내 버스를 이용하고 자신의 식사는 손수 만드는 등 청빈하고 겸손한 생활로 많은이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왔다.

그는 대주교 관저 대신 조그만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누구에게나 격의없이 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교황 측근 신부들은 "그는 매우 소박한 성직자였다"며 "늘 사람들과 가까이 어울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즉위명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13세기 초 청빈한 삶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신으로 존경받았던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聖) 프란치스코'의 삶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교황청도 "즉위명은 새 교황이 소박하고 박애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탱고와 풋볼을 즐기며 아르헨티나 프로축구리그 산 로렌조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졌다.

라틴아메리카출신 교황 탄생의 배경에는 이탈리아계라는 그의 출신 성분과 독일에서 유학한 점이 보수적 성향의 콘클라베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그는 10대 시절 감염으로 폐 하나를 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정확히 어떤 종류의 세균에 감염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점 때문에 일각에서 전임 베네딕토 16세와 마찬가지로 역시 77세의 고령인 새 교황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끊이질 않고 있다.

하지만 전문의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건강상태에 대해 "10대때 폐 하나를 제거한 그가 77세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폐가 건강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치하에서 36세 나이로 예수회 아르헨티나 지부를 약 6여년 동안 이끌면서 정치와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아르헨 예수회가 좌파 성향의 다른 남미 국가 가톨릭을 따라 정치에 종교의 적극적인 참여를 주창하는 해방 신학에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이로인해 일각에서는 그가 군부정권에 대해 비판의 각을 세우지 않았다는 비판도 들었다.

당시 그의 대변인이었던 쥘레르모 마르코는 그가 "예수 사회의 비 정치화를 유지하라"는 단순명료한 지침을 내렸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0년 사망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 정권에서 "우리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정의의 결핍이라는 수치스러운 상황에 살고 있다"며 빈민층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비판하는 등 때때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대주교로서 가톨릭 신자가 절대 다수인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는 아르헨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낙태, 동성결혼, 피임 등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신학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추기경 시절이였던 2010년 아르헨 정부가 남미 국가 중 처음으로 동성 결혼을 허용하자 "신의 계획에 대한 파탄행위"라며 심각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종교전문가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교리에는 보수적이면서 사회 문제에는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철도노동자 아버지와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를 둔 프란치스코 교황는 학창시절 화학기술자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다 산호세 플로레스 성당의 고백실에서 신의 부름을 받고 그때부터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 17세 때 일이었다.

교황청 공보실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지만 사제직을 선택해 비야 데보토의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22살이던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하고 산미겔 산호세대학에서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6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산미겔 시에 있는 성 요셉 대신학교에서 철학사 학위를 받고 67~70년 산미겔 시에 있는 성 요셉 대신학교에서 신학 학위를 받았다.

69년 12월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70~71년 스페인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3차 수련을 마치고 73년 4월22일 종신 서원을 했다.

1969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칠레와 독일에서 수년간 유학한 뒤 귀국해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 원장을 거쳐 199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주교에 올랐다. 3년뒤에는 추기경에 임명됐다.

80~86년 산미겔 철학·신학대학 학장으로 일하면서 산미겔 교구의 파트리아르카 산호세 본당의 주임 사제를 겸임했고 86년 3월 독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마쳤다.

당시 교황이었던 故 요한 바오로 2세는 92년 5월20일 그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했다.

이어 97년 6월3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부교구장 주교가 됐고 98년 2월28일 안토니오 콰라시노 추기경 후임으로 대교구장이 됐다.

2001년 2월 2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추기경회의에서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그의 추기경 명의 본당은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본당이다.

그는 2005년 11월8일부터 2011년 11월8일까지 6년 동안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교황청에서 경신성사성, 성직자성, 수도회성, 가정평의회, 라틴아메리카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br>

pt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