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PD "삶에 대한 도전, 기록으로 남겨 희망 주고파" [책과 사람]

'들개처럼 연출하다' 펴낸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 인터뷰

편집자주 ...다채널의 뉴미디어 시대라지만, 책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존재입니다. 책은 전문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부터 각 분야 유명인사와 스타들 및 이웃들의 흥미로운 경험들을 기반으로 탄생합니다. [책과 사람]을 통해 각양각색의 도서들을 만들어낸 여러 저자 및 관계자를 직접 만나, 책은 물론 그들의 삶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김영희 PD ⓒ News1 구윤성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쌀집 아저씨'로 친숙한 김영희 PD는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을 웃기고 울리며 들었다 놨다 한 사람이다. 그것도 드라마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으로 말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중 그가 만든 프로그램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신간 '들개처럼 연출하다'는 김영희 PD가 펴낸 연대기로, 그의 PD 생활 약 35년간 있었던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에피소드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과 실패 등을 허심탄회하게 공개하며 독자들에게 새 희망도 준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 '전파견문록', '!느낌표' 등으로 국민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그의 기획과 연출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를 직접 만나 인생과 연출 철학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간의 방송 인생을 정리하며 내가 배운 점, 내가 도전한 새로운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야 에피소드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뭔가 더 사회적인 가치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내가 살아온 길을 통해 뭔가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PD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인가.

▶어릴 적 꿈은 아니었다. 엉뚱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으니, 뭔가 독창성의 씨앗은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방송일을 할 줄은 몰랐다. 대학 4학년 때 아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MBC에 입사시험을 치렀다. 마지막 면접 때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냐고 묻기에 '요리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심드렁하던 면접관들이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다들 시사, 다큐, 드라마 등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하는데 느닷없이 '요리'를 얘기하니 그 또한 엉뚱해 보인 듯하다.

-왜 요리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는가.

▶원래 요리가 무척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요리 프로그램은 다들 진지하고 엄숙했다. 요리 전문가가 나와 요리를 만들고 아나운서가 점잖게 받쳐주는 식이었다. 그게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나라면 이주일 같은 분을 보조 MC로 모셔서 요리 프로그램을 쇼처럼 재밌게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아, 합격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웃음)

-주로 예능프로그램을 많이 맡은 이유는.

▶딱히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결정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수습이 끝나고 PD 연수 때 한 선배가 앞으로는 예능의 시대라고 조언해 줬다. 마침 쇼 현장만 가면 마음이 설레곤 했다. 또한 최종면접 당시의 에피소드도 이미 사내에 파다했다. 그래서 두말없이 예능을 지원했다. 30년이 지난 후 MBC 콘텐츠 부사장이 됐을 때 그 선배에게 전화해 감사를 표했다.

-많은 프로그램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경규가 간다'라는 코너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통법규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에게 냉장고를 선물로 주는 기획이었다. 다들 반대했는데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였다. 첫 방송분을 찍는데 새벽 4시가 넘어도 냉장고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 포기할 때쯤 드디어 소형차 한 대가 황단보도 앞에 멈춰 섰는데, 운전자와 동승자가 뇌성마비 장애인 부부가 아닌가. '왜 차를 세우셨나요'라는 이경규의 물음에 그의 답은 '저는 원래 신호를 지켜요'였다. 과연 누가 정상인이고 누가 장애인이란 말인가. 그 순간 다들 목이 메고 애써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기쁨, 감격, 부끄러움이 섞인 '찐' 눈물이었다. 지금도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슴이 먹먹해진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들개처럼 연출하다'(제공 애플북스)

-PD로서 갖춰야 할 중요한 자질이 있다면.

▶PD는 현장의 총괄 감독이다. 전쟁터의 야전 소대장이다. 온갖 변수에 대응하면서 원하는 그림과 장면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수용자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30여 년 전 일본 연수 시절, 버스 정류장에서 본 승객을 위한 버스 출발·도착 시간표나 백화점 점원이 비가 와도 끄떡없도록 배려한 꼼꼼한 포장 등을 보고 깨달았다. 방송도 수용자(시청자) 입장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일본 연수에서 배워온 것이 많다던데.

▶그렇다. 그중 하나는 빈틈없는 현장 스케줄 관리 시스템이다. 모든 스태프와 출연자가 큐시트를 공유하며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시간 낭비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 한국에 돌아와 이러한 시스템을 제작 현장에 도입했다. 또한, 방송국 내부를 리모델링해 부서별로 독립된 회의 공간도 만들었다. 한국 방송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얼마 후 모든 방송국이 같은 시스템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화면의 상시 자막 삽입도 처음 아닌가.

▶맞다. 역시 일본 연수 시절, 문자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방송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당시 우리나라 방송에서의 자막 활용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엄청난 양의 자막을 주문하자 스태프는 반신반의했다. 또한 방송 직후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위에서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역시 확신이 있었기에 모른 척 밀고 나갔다. 두어 달 후 다른 방송사에서도 자막을 넣기 시작했다. 지금은 자막 활용이 일반화돼 있다.

-방송계 문화를 바꾼 혁신이 돋보인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크다. 방송국 내에서 회의실을 만들어 원시적인 제작 환경을 개선한 일, 제작 현장에서 정보 공유 제한으로 인한 시간 소모를 없애 효율성을 높인 일, 시청자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감을 넓힌 일, 단순한 재미에 더해 감동까지 주는 예능 프로그램에 도전한 일 등이 모두 기존 상식을 벗어나 보려 한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파격을 받아준 분들도 대단한 분들이다.

-제작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현장에선 철저한 모습도 보였지만, 진심으로 대하고 출연자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존중했다. 심지어 큐 사인을 내리면서 현장 소음이 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출연진과 스태프들에게도 계속 떠들어도 된다고 주문했다. 그러다 보니 촬영 현장이 더욱 생동감 넘쳤다. 출연자들도 신나게 방송하고 스테프들도 긴장을 풀고 재밌게 즐겼다. 그런 분위기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시청자들에게도 전달됐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더 하고 싶은 일은.

▶진정으로 시청자가 즐거워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또한 모바일 시대에 맞는 제작 시스템도 창출하고 싶다. 현재의 제작 환경은 또다시 격변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여행 작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 이에 대한 책도 준비 중이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