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흔적에서 MZ세대 인증샷 명소로 기억되는 동네들
일제 수탈의 중심 인천 개항장부터 100년 전에서 멈춘 포항까지
인천·군산·광주·목포·대구·포항…곳곳에 남아 있는 상흔들
- 윤슬빈 기자
(서울=뉴스1) 윤슬빈 기자 = 제77주년 광복절이다. 저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다른 만큼 이번엔 특별하게 슬픈 흔적이 곁들여진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아픈 시간의 흔적을 보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가 바라는 것은 기억일 것이다.
일제의 수탈의 중심이 된 장소부터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택과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살았던 마을까지 이제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MZ세대에게 '인증샷' 명소로 잘 알려진 동네들을 소개한다.
◇ 인천 개항로
복닥거리는 차이나타운 옆 인천 개항장 근대역사문화타운은 개항 후 13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거리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수탈의 상처가 남은 아픈 흔적이지만, 차이나타운과 일본식 건물이 뚜렷하게 나뉜 풍경이 이채로운 곳이다.
이 거리엔 옛 일본영사관인 중구청과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 등 근대 건축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아지트인 제물포 구락부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도 만날 수 있다.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 언덕 위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한 채가 있는데 바로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수많은 외국인들의 아지트인 제물포 구락부다.
일본인들이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01년에 지었다.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지붕을 양철로 덮었으며 내부에는 사교실·도서실·당구대 등을 마련했고, 따로 테니스 코트도 가지고 있다. 현재는 제물포의 옛 이야기를 안내하는 전시관으로 사용된다.
'제물포구락부'의 원래 명칭은 '제물포 클럽'이었다. 그러나 조계 제도가 폐지된 이후 '클럽'이 일본식 가차음인 '구락부'로 불리고,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888년 일본 조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도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3층짜리 양옥 건물은 겉보기에도 세련된 모습이다.
객실 역시 초가집에 주막이 딸린 우리네 여관과는 많이 달랐다. 침대가 있는 11개의 양실과 240여 개의 다다미방, 서양 음식을 제공하는 연회장 등을 갖췄다. 일본의 해운업자가 세운 호텔임에도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들을 응대했다고 전해진다.
대불호텔은 1918년 중국집으로 바뀌었다가 1978년 철거됐는데, 40년 동안 터만 남아있던 곳에 중구생활사박물관이 들어서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 군산 장미동
일제강점기 참혹한 수탈이 할퀴고 간 군산은 상처투성이다. 군산항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로 왜곡된 성장을 겪는다. 근대화의 상징인 기찻길이 놓이고 신작로가 뚫렸지만, 일제의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중심은 군산 내항이 있는 장미동 일대다. 장미동(藏米洞)은 일제강점기에 수탈한 쌀을 보관하던 창고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여행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출발하면 좋다.
박물관을 바라보고 왼쪽에 구 군산세관 본관(전북기념물 87호)이, 오른쪽에 장미공연장과 장미갤러리, 미즈카페, 군산근대미술관으로 변신한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372호),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쓰이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374호)이 차례로 나타난다. 구 군산세관 본관은 눈에 쏙 들어오는 외관이 인상적이다.
구 군산세관 본관은 눈에 쏙 들어오는 외관이 인상적이다. 1908년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에 지붕 위 뾰족한 탑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고전주의 건축물로 꼽힌다. 현재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장미동 건너편엔 신흥동이 있다. '히로쓰 가옥'이라 불리는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장군의 아들' '타짜'등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일본인 거상 히로쓰가 지은 2층 주택으로, 잘 가꾼 일본식 정원이 있어 이국적이다.
◇ 광주 양림동
광주 양림동으로 가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했던 서양 선교사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2층 벽돌 건물로 광주에 현존하는 양식 주택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미국인 선교사 우일선(Wilson)에 의해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전해올 뿐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 내부를 개조해 대한예수교 장로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뒤편 산책로를 따라가면 선교사 묘원에 이른다. 배유지와 우일선을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잠든 곳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고요한 무덤들 앞에서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바로 이어 자리한 수피아여중·고교에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수피아 홀, 배유지 기념예배당, 윈스보로우 홀과 배유지를 기념하는 커티스 메모리얼 홀도 학교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수피아여중·고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휴교와 폐교를 거듭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들 근대건축물의 중심에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이 서 있는 이유다.
◇ 목포 원도심
목포는 일제강점기 당시 군수물품이나 한반도의 물품을 일본으로 빼돌렸던 항구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일제강점기의 건물도 많이 남아있다.
목포 구시가에는 근대사를 대표하는 두 장소가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구 목포 일본영사관)과 목포근대역사관 2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다. 이곳을 돌아보고 나면 구시가 곳곳에 남은 근대건축물이나 근대사의 흔적을 더 익숙하게 느낄 수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일제의 경제적 본거지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일제 수탈의 상징적인 장소다. 일제가 1920년 조선의 경제를 효율적으로 독점하기 위해 설립했는데, 건물 안팎에 욱일기와 벚꽃 문양을 장식했다. 이곳에 1920년대 말 목포와 조선 말기의 모습, 항일운동과 일제강점기 수난의 역사가 사진으로 전시된다.
목포엔 일본인들의 종교 활동을 한곳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의 오거리문화센터는 이전 이름은 구 동본원사였다.
동본원사는 목포에 들어선 일본 첫 불교사원으로 정식명칭은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이다.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1898년 4월에 세워졌으며 목포심상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목포 내에서 일본인 소학교로 최초·정식 운영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정광사의 관리를 받다가 1957년부터 목포중앙교회로 사용하게 되어 사찰이 교회가 되는 이색적인 약력을 가지게 되었다. 2010년 1월 19일에 오거리문화센터로 개관하여 각종 문화행사 및 전시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대구 청라언덕
봄이면 담쟁이덩굴 푸르른 대구 청라언덕에는 오래된 붉은 벽돌집이 오순도순 자리 잡았다. 비슷한 듯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벽돌집은 지은 지 100년이 훌쩍 넘는 근대 문화유산이다.
원래 더 많은 집이 있었지만, 지금 남은 건 세 채뿐. 모두 20세기를 전후해 대구로 온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건물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다. 개항장 부산을 통해 대구로 온 선교사들은 청라언덕에 자리 잡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지도 못한 시신을 묻던 곳이라, 별다른 텃세 없이 이방인들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청라언덕이란 이름도 이들이 언덕 곳곳에 심은 담쟁이덩굴에서 비롯됐다.
'블레어 주택'는 1901년 한반도에 들어온 선교사 블레어가 살던 집으로 1910년경 지었다. 당시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로 기초를 다지고, 굴뚝이 높은 2층 벽돌집을 올렸다. 2층 박공을 대부분 차지하는 반원형 유리창이 눈길을 끈다. 이 창은 2층에 있는 선룸(sunroom)으로, 자연광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블레어 주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챔니스 주택'이 있다. 이곳에는 선교사 챔니스, 미국 북장로회에서 세운 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의 레이너 교장, 병원(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의 마펫 원장 등이 살았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풍 주택은 사람 인(人) 자 모양 지붕의 붉은 벽돌 건물과 평지붕의 흰색 건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덕분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뿐 아니라, 건축 분야 논문 소재로도 인기다.
◇ 포항 구룡포
포항 구룡포에는 '일본인 가옥거리'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 약 500m의 거리에 80여 채의 일본 가옥이 남아있다.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입성한 것은 100여년 전 쯤으로 알려진다. 가가와현(香川縣)의 고깃배들이 물고기떼를 좇아 이곳까지 오게 됐다. 이후 많은 일본의 어부들이 구룡포로 이주했다. 1932년에는 그 수가 300가구에 달했다니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문이다. .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사라지면서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까지 일제강점기는 지속된다. 일본인 어부들이 구룡포에 들어선 시기와 맞물린다.
건물들은 저마다 품은 이야기가 있다. '호호면옥' 간판이 붙은 건물은 당시 구룡포에서 으뜸가는 숙박시설 '대등여관' 이었다. 지금은 냉면 등을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다. 현재 일본식 찻집이 들어선 '후루사토'는 80년 전의 인기 요리집 '일심정'이었다.
일본인 가옥거리 인근엔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있는데,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가 지은 집이다. 2층으로 된 일본식 목조가옥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왔단다. 아기자기한 정원과 일본식 다다미를 품은 전형적인 일본식 집은 구석구석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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