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인하 늦어 경제 시들"…정부-한은 줄다리기[시험대 오른 한은]①

"고금리에 내수 위축, 8월에라도 인하" 정부·여당 압박
"집값 재급등 안돼" 독립성 지키며 해답 찾아야할 한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뉴스1

(서울=뉴스1) 김혜지 김유승 기자 = "고금리가 자금 여력 없는 중소기업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황우여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8월 부동산 대책이 금리 인하에 좋은 여건을 조성해 소상공인과 금융 취약자들께서 안락하게 계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덕수 국무총리)

한국은행에 조기 기준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외부 발언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고금리 환경이 오래된 탓에 소비·투자가 위축되고 경제 성장이 저하됐으므로 한은은 '8월 인하'를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고금리에 따른 내수 위축 강도가 예상보다 강했던 점을 고려하면 일견 일리 있는 요구다. 반면 선제 금리 인하에 따른 금융 불안 위험성을 간과했다는 지적과 중앙은행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은 불가피해 보인다.

11일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KDI는 지난 8일 올해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 전망을 석 달 전보다 0.1%포인트(p) 낮춘 2.5%로 수정했다.

KDI가 전망을 하향 조정한 주된 이유는 한은의 고금리 장기화 기조였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성장 둔화는 내수 부진에 주로 기인한다"며 "고금리가 지속되면서 민간 소비가 낮은 증가세에 그쳤다"고 꼬집었다.

한은이 적정한 금리 인하 시기를 놓쳤다고도 평가했다. 정 실장은 "금리 인하가 생각보다 지연됐다"며 "경기·물가에 맞춰 금리가 조정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금융 안정 등이 강조되다 보니 늦어졌다"고 말했다.

사실상 한은이 적정 시점인 5월보다 금리 인하를 늦추는 바람에 내수가 부실해졌고 경제 성장 속도가 느려졌다는 취지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내수가 실제로 상당히 나쁘다"며 "이 상태에서 금리 인하는 빚 많은 자영업자나 취약 가구 등의 가처분 소득을 올리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에 KDI는 8월 금리 인하를 주장했다. 정 실장은 "물가와 경기를 감안하면 한은이 금리를 지금보다 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8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충분히 (금리 인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책 연구기관인 KDI가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전환 시점을 직접 거론하고 적정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정부와 정치권 또한 조기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발언을 내놓고 있다.

지난 6월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의 "통화정책을 유연히 가져가야 한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금리는 내려갈 방향밖에 없다"는 한덕수 국무총리 언급(7월 3일)과 "선제적 금리 인하가 제때 이뤄져야 한다"는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의 기자회견(지난 6일)까지 압박 강도가 점차 오르고 있다.

그러나 한은은 선뜻 8월 인하를 단행하기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다.

물가 안정 상황만 보면 지난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2.6%를 기록하면서 이창용 한은 총재가 앞서 언급한 금리 인하 조건인 하반기 월평균 물가 상승률 2.4%에 근접했다.

이에 물가만 따질 경우 금리 인하 여건이 조성됐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금융 안정 상황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섣부른 금리 인하 땐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상승세인 주택 가격이 치솟을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한다.

실제로 이 총재는 지난달 금통위 직후 "금리 인하 시점에 대해 잘못된 시그널을 줘서 주택가격 상승을 촉발하는 그런 정책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율도 우려할 만하다. 미국은 오는 9월 정책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채권 시장은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다음 달 인하 확률을 100%로 잡고 있다.

이미 1달러당 1360~1380원으로 높은 환율이 더욱 오르면, 수입 물가가 뛰어 그나마 안정세에 접어든 물가 상황마저 흔들릴 수 있다. 물가 안정이 제1 설립 목표인 한은으로서는 미국보다 빠른 인하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아직 금리로 어떤 정책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서 "미국보다 금리를 선제적으로 인하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맞다"고 평가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가 진정되지 않는 한 경기 진작책은 쓰면 안 된다"면서 "게다가 기준금리가 미국과 2%포인트 차이가 나고 환율이 불안한데, 경기 둔화 때문에 금리를 내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단언했다.

지난 7월11일 금통위 개의 장면 /뉴스1

애당초 정부·정치권의 금리 인하 요구는 중앙은행 독립성을 해치는 '외압'에 해당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여당에서 한은 부총재를 불러 하반기 청사진을 묻는 등의 행위는 압박이자 독립성 침해"라면서 "옛날의 '재무부 출장소' 별칭을 연상케 한다"고 비유했다.

하준경 교수는 "객관적 분석에 따른 발언이라도 그것이 압박으로 비치게 되면 중앙은행 중립성 내지는 신뢰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정부가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인상을 주면 정부 스스로 책임을 지우는 길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한은은 외부로부터 독립을 지키면서도 우리 경제에 가장 적절한 인하 시점을 골라야 하는 고된 시험을 치르게 됐다.

정세은 교수는 "한은은 금리 인하가 내수 부양으로 이어질 것이냐, 금융 불안정 확대로 갈 것이냐를 두고 고심이 깊을 것"이라며 "올 초 이창용 총재가 가계대출이 이렇게 마구 늘어나면 금리를 내리기 어렵다고 했던 언급이 그러한 부담감의 발로"라고 말했다.

icef0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