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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인생]⑩언더그라운드 래퍼→대기업 사원…"회의실서 볼 줄이야"

롯데컬처웍스 석승명 대리…"래퍼 출신 최대 장점은 '팀워크'"
"힙합 전성시대 누리세요…미련 남지 않아야 '제2의인생"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2019-04-30 09:00 송고 | 2019-04-30 15:44 최종수정
편집자주 청년실업 100만시대에 잘나가는 대기업이나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우는 30·40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억대' 연봉조차 마다하고 사표를 쓰는 이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런가하면 거친 가사를 읊조리던 래퍼가 '과거'를 정리하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그에게 아쉬움은 전혀 남지 않았을까? <뉴스1>은 다양한 '이력'을 갖고 '제2의 인생'을 도모하는 이들을 만나 시대의 풍경을 그려봤다.
'언더그라운드 래퍼'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변신한 래퍼 '디필링' 석승명 씨가 롯데시네마 본사에서 뉴스1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석 씨는 롯데시네마에서 배급 담당을 맡고 있다. 2019.4.27/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언더그라운드 래퍼'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변신한 래퍼 '디필링' 석승명 씨가 롯데시네마 본사에서 뉴스1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석 씨는 롯데시네마에서 배급 담당을 맡고 있다. 2019.4.27/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힙합이 이토록 사랑 받던 시대는 없었다"

힙합계가 전성시대를 맞았다. 래퍼들의 끼와 음악성을 겨루는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는 지원자 1만 명 이상이 몰린다. 래퍼들은 마음껏 허세를 뽐내고 있다. 약속이라도 한듯 "음악으로 성공해 비싼 집을 사고 외제차를 몰고 다닐 것"이라는 내용의 랩가사를 쏟아낸다.
이들에게 허세는 '패션'과도 같다. 화려할수록 대중의 비난을 받지만 동시에 열광적인 환호를 끌어낸다. 그러나 래퍼 자신도, '허세'를 듣는 대중도 안다. 래퍼들은 '10000 대 1'이라는 쇼미니더머니의 우승 경쟁률보다 더 극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생계를 위해 음악이 아닌 다른 삶을 고민하는 래퍼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석승명씨(32)는 10년 경력의 베테랑 래퍼였다. 과거 '디필링(D.FEELING)'이라는 예명으로 총 1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각종 공연만 수백회 참가했다. 국내 주요 힙합 전문 잡지에서 "열정과 패기가 가득한 신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대를 모았던 래퍼였다. 

석씨의 현재 직업은 회사원. 직함은 '대기업' 롯데컬처웍스 영화 배급팀 대리다. 그가 목에 걸고 나온 사원증은 '제2의 인생'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음을 보여주는 상징 같았다. 날이 선 랩보다 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 후배 래퍼들에게 그는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지난 25일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 타워 27층 회의실에서 석 씨와 마주 앉았다.

◇"손 머리 위로" 외치던 래퍼, 회의실서 '수익 모델' 논의
"일단 후배들이 이 시대를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어요. 원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할 수 있는 선까지 열정을 쏟아 부었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안 된다'는 판단이 들면 '제2의 인생'을 준비하면 돼요. 최선을 다해야 미련이 안 남죠. 미련이 남지 않아야 두 번째 인생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석씨는 "다시 찾아오기 힘든 힙합 전성시대"라며 이처럼 강조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전달했다. 그는 '풋 유어 핸즈 업(Put your hand  up·손 머리 위로)'를 외치는 공간에서 영화 산업 수익 모델을 논의하는 회의실로 활동 무대를 옮겨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래퍼 특유의 반항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느릿하고 리듬감 있는 말투만이 래퍼라는 '이색 경력'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래퍼'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변신한 래퍼 '디필링' 석승명 씨가 롯데시네마 본사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석 씨는 롯데시네마에서 배급 담당을 맡고 있다. 2019.4.27/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서울 토박이인 그는 2006년 대학교 입학 후 래퍼로 활동했다. 홍대와 강남 클럽·대학교 축제를 주무대로 삼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출발했다. 한양대학교 국문과 출신인 그는 언어를 매만져 다듬어 완성하는 일에 자신 있었다고 한다. 열애하듯 힙합에 빠져들어 연애편지 쓰듯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동료들에게는 작곡 프로듀싱법을 배우며 음악적 역량을 키웠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힙합 음악을 즐겨 듣는 친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대학교 입학 후 습작하듯 랩 가사를 지어 불렀어요. 처음에는 '한 번 즐겨보자'는 식으로 했죠. 그런데 힙합 커뮤니티에 자작 랩음악으로 만든 '믹스테이프'('가볍게 만든 앨범'을 의미)를 올렸더니 반응이 꽤 괜찮은 것이에요. '즐기자'에서 '한 번 제대로 해자'로 마음이 바뀌었죠."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래퍼 성공 결정짓는 기준"

석씨는 2010년 8월 EP(짧은 녹음물) 앨범 '플라이 위트 미(Fly wit me)'를 발매했다. 활동 당시 예명 디필링의 첫 앨범이었다. 디필링이란 영문자 'Deep'과 ’feeling'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상대에게 깊은 인상을 주겠다"는 야심찬 의지가 여기에 담겼다.

석씨는 2013년 6월 싱글앨범 '힙부심'을 발표했다. 힙부심이란 힙합 우월주의를 의미한다. 힙부심을 꼬집는 노래 '힙부심'이 이 앨범에 수록됐다. "니들의 협박에 안 쫄아 나/어릿광대들 마냥 더는 같이 안 놀아나/높아진 내 위치를 봐라"라는 직설적인 가사가 인상적이다.

3년이 지난 뒤 석씨는 보다 대중적인 음반을 발표했다. 힙합 마니아 뿐 아니라 일반 대중과도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앨범 '인사이드 아웃'이었다. 석씨는 지난 2010년 8월부터 2016년 10년까지 싱글·믹스테이프·EP를 포함해 총 12차례 앨범을 선보였다. 그는 슈퍼루키챌린지·자라섬페스티벌·홍대 잔다리 페스티벌 등 각종 공연·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주요 경연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낼 정도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조금 더 하면 이른바 '오버 그라운드(지상파 방송 등 의미)'에 진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인터뷰 전부터 석씨에게 계속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는 '재능'이라는 단어를 쓰며 "아쉬움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래 래퍼 중에 '이센스'라는 분이 있어요. 거침없는 행동으로 때론 논란이 되지만 음악성만큼은 국내 최고 수준이지요. 그가 부른 노래 '독'의 가사를 들으면 몸이 전율하는 감동을 받아요. 한 글자 한 글자 허투루 쓰지 않고 공들였다는 게 느껴지지요. 그런 게 바로 '재능'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결국 재능 있는 래퍼만이 살아남아 이름을 남기더라고요."

언더그라운드 래퍼 '디필링'으로 활동하던 당시 석승명씨(석씨 제공)© 뉴스1
언더그라운드 래퍼 '디필링'으로 활동하던 당시 석승명씨(석씨 제공)© 뉴스1

◇"롯데컬처웍스 최대 장점은 수평적 조직문화…모든 의견 수렴"

석씨는 영화를 워낙 좋아해 '제2의 인생' 결심 후 '롯데컬처웍스 입사'를 꿈꿨다고 한다. 2014년 1월 바람대로 롯데컬처웍스에 입사했다. 롯데컬처웍스 관계자는 "석 대리의 래퍼 경력은 개성 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어 입사 채용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됐다"며 "입사 후에도 업무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현재 주요 업무를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씨는 매출 관리·상영관 총괄 업무 등을 거쳐 지난달부터 배급 업무를 하고 있다. 국내외 영화를 배급해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일이다. 대중성과 예술성 모두 충족하는 영화를 배급 영화로 선택하는 작업이다.

그에게 낯선 일은 아니다. 래퍼로서 대중성이냐 음악성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한 경험이 있어서다. 배급 영화 선택 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핵심 조직'인 배급팀으로 이동한 이유다. 석씨는 일주일에 영화 세 편 이상을 관람하며 트렌드를 살핀다고 한다. 그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는 롯데컬처웍스의 장점이자 경쟁력"이라며 힙부심 대신 '애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팀원 전체의 의견이 반영됩니다. 회사 전체 직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도 있죠. 아무리 지위가 높다고 해도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구조입니다. 개인적으로 롯데컬처웍스의 이런 문화가 계속 이어졌으면 해요."

◇"오는 5월 '어린의뢰인' 개봉…아동학생 경각심 심어주길"

롯데컬처웍스가 최근 배급 영화로 결정한 것은 '어린 의뢰인'이다. '칠곡 아동 학대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로 오는 5월에 개봉한다. 지난 2013년 8월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계모가 의붓딸을 살해한 사건을 다룬 영화다. 석씨는 "공익적인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라며 영화에 큰 기대감을 보였다.

"무엇보다 영화의 의미에 관객이 주목했으면 합니다. 아동학대 논란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지요. 최근에는 금천구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해 전 국민이 분노했어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관련 진상 조사 요청 글이 올라온 지 2주 만에 20만명이 청원에 동의했지요. '어린 의뢰인' 상영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근절 대안을 고민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석씨의 성실한 근무 태도는 사내 구성원의 래퍼에 대한 편견을 개선하는 계기가 됐다. 예술 문화 사업을 한다고 해도, 롯데컬처웍스는 조직 적응력을 가장 중시하는 기업이다. "팀보다 위대한 개인이 없다"는 게 회사원들의 불문율이다. 개성 강한 래퍼가 조직 분위기를 헤치지 않을까하는 시각도 있지만, 석씨는 오히려 래퍼야말로 팀워크(협업)의 중요성을 안다고 강조했다.

"래퍼 홀로 앨범을 맡아 제작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동료 래퍼나 가수들과의 협업으로 앨범이 만들어지고, 이렇게 제작된 앨범이 완성도가 높습니다. 자기 혼자 돋보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앨범 제작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저는 오히려 래퍼 생활을 통해 팀워크의 중요성을 깨우쳤어요."

배우 이동휘(왼쪽부터), 유선, 장규성 감독이 10일 오전 서울 건대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어린 의뢰인’ 제작보고회에 참석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어린 의뢰인’은 오직 출세만을 바라던 변호사가 7살 친동생을 죽였다고 자백한 10살 소녀를 만나 마주하게 된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 드라마이다. 2019.4.10/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배우 이동휘(왼쪽부터), 유선, 장규성 감독이 10일 오전 서울 건대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어린 의뢰인’ 제작보고회에 참석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어린 의뢰인’은 오직 출세만을 바라던 변호사가 7살 친동생을 죽였다고 자백한 10살 소녀를 만나 마주하게 된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 드라마이다. 2019.4.10/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다시 앨범 낸다면 밝은 메시지…가족의 소중함 표현할 것"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팀에서 석씨를 호출했다. "인터뷰 중인데 곧 끝날 것 같다. 복귀하겠다"고 말하는 석씨는 우리 주변의 흔한 '30대 초반 대리'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제2의 인생' 결정 후 가정을 꾸렸다. 롯데컬처웍스에서 만난 친구와 약 1년간 사내 연애를 했고 지난 2017년 2월 결혼했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생후 6개월된 딸이다. 석씨의 삶은 소박한 행복들로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행복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없을까? 그에겐 '힙합 정신'이 아직 남아 있었다.

"현실적으로 다시 무대에 서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앨범 제작은 하고 싶어요. 예전에는 음악을 통해 상처나 삶의 회의감을 토로했다면 이제는 좀 더 밝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미국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의 노래 '온니원'처럼 가족에 대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온니원, 유일한 존재인 가족에 대한 저의 마음을 말이에요."


mr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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