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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나고 못 쉬고"…직장갑질 심각하지만 방법은 '속앓이'뿐

2018년 직장갑질 지수 100점 만점에 평균 35점 '심각'
현행법으론 직장갑질 해결 안 돼…괴롭힘 방지법 절실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 2018-12-02 15:2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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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휴가 부자에요. 벌써 12월인데, 쌓인 대휴(대체휴가)랑 연차만 합쳐도 40일쯤 돼요"

직장인 이유미씨(32·가명)는 남은 휴일 수를 하나하나 세어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올해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이씨가 써야 하는 휴가는 38일이다. 하지만 이씨는 "12월에도 사흘만 연차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연차와 대휴를 쌓아두고도 쓰지 않는 이유는 그가 '일 중독'이어서가 아니다. 이씨가 다니는 중소기업은 '주 52시간 근로제'가 적용되는 사업장이 아니고, 휴가의 '휴'자만 꺼내도 인상을 찌푸리는 사장의 눈초리 때문이다.

이씨는 "하루는 3주 내내 쉬지 않고 일해 앓아누울 지경이었다"며 "이틀 대휴를 신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너만 힘드냐'는 면박이었다"고 토로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가 지난달 발표한 '2018년 대한민국 직장갑질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 갑질 수준은 평균 35점(100점 만점)으로 나타났다.
이씨의 경우처럼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고 답한 직장인은 임금 수준·기업 규모를 떠나 무려 43.6점을 기록했다.

문제는 한국 기업에 만연한 '직장갑질'은 대부분 처벌이나 해결이 까다롭다는 점이다. 마땅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없는 데다 노동청이나 수사기관에 신고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아 처벌이 어렵다. 결국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하는 셈이다.

'2018년 대한민국 직장갑질 실태조사'(직장갑질 119 제공)© News1
'2018년 대한민국 직장갑질 실태조사'(직장갑질 119 제공)© News1

◇따돌림 당하고 행사동원…범죄 당해도 회사는 '모르쇠'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는 A씨(27·여)는 입사 직후부터 겪은 텃새 때문에 4개월 넘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전했다.

정당한 채용과정을 거쳐 업무를 배정받았지만 A씨의 상사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A씨는 "상사가 저와 일을 나누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는 눈치였다"며 "지시하지 않은 일을 두고 '왜 내가 지시한 일을 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거나 많은 사람 앞에서 면박을 줬다"며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직급이 높은 상사가 대놓고 A씨를 괴롭히자 자연히 '집단 따돌림'이 시작됐다. A씨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까지도 저와 접촉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며 "부장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부서를 바꾸기 전까지 4개월 동안 괴롭힘이 계속됐다"고 말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최근 대기업을 퇴사했다는 B씨(28·여)는 "입사 직후부터 이해할 수 없는 갑질을 강요받았다"면서 "오직 '회장이 참석한다'는 이유로 신입들을 대거 동원해 몇 달 동안 오후 11~12시까지 행사 준비에 매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결국 사직서를 제출한 순간에도 회사는 차가웠다. B씨는 "상사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돌아온 말은 '너 집이 잘사나 봐?'라는 빈정거림이었다"고 회상했다.

공기업에 다니는 C씨는 몇 달 전 직장동료부터 '몰카 범죄'를 당했다.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고 자신이 범죄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안 C씨는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유급휴가'를 신청했지만, 회사는 '쉬려거든 산업재해를 신청하라'며 이를 거절했다.

심지어 해당 회사는 경찰로부터 '가해자와 피해자를 격리조치하라'는 통보를 받고도 3주 가까이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도록 내버려둔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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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 100곳 중 35곳 갑질 만연…대기업이 더 심각

인신공격에 가까운 질책이나 악의적인 따돌림, 휴가조차 쓸 수 없게 만드는 압박감, 강제적인 행사 동원까지.

'직장갑질 119'가 총 10개 영역 68개 지표로 나눠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대한민국 기업 100곳 중 35곳에서 직장갑질이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68개 지표는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산업안전보건법 △노동조합법 등 현행법이나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을 근거로 만든 항목으로, 정상적인 직장이라면 갑질 지수가 '0점'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표별 점수를 보면 한 자리 점수가 나온 지표는 하나도 없었다. 지표별로는 △승진·해고 등 인사 문제 38.2점 △채용과정 및 노동조건 37.1점 △출산·육아 36.9점 △차별 및 괴롭힘 35.8점 △건강 및 안전 35.8점 △조직문화 35.6점 △작업 및 노동시간 35.3점 △폭언·폭행 및 성희롱 30.6점 △노동 권리 33.5점 △퇴직·해고 30.4점 순이었다.

직장갑질 119가 '심각한 수준'으로 규정한 40점 이상 갑질은 68개 지표 중 25% 수준인 17개에 달했다. '취업 정보 사이트의 채용 정보가 실제와 다르다'는 항목이 47.1점으로 가장 높았고 △시간 외 수당이 없거나 실제보다 적다(45.9점) △채용 면접 때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44.4점) △직장 안에 쉴 공간이나 시설이 없다(44점)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43.6점)가 뒤를 이었다.

사업장 규모별로는 민간 대기업(300인 이상)과 공공기관 부문 갑질 지수가 각각 37.5점과 35.6점으로, 민간 중소 영세기업(28.4점)보다 높게 나타났다. 특히 취업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외국계 대기업은 68개 갑질 지표 중 12개가 50점을 넘어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이 1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직장갑질119 주최 2018 대한민국 직장인 갑질지수를 공개하고 있다. 2018.11.19/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이 1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직장갑질119 주최 2018 대한민국 직장인 갑질지수를 공개하고 있다. 2018.11.19/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갑질 당해도 해결책 없어…괴롭힘 방지법 통과돼야"

문제는 이런 '직장갑질'을 마땅히 해결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직장 내 갑질'에 대한 정의가 아직 명확하지 않고, 현행법으로도 규율하기가 모호해서다.

이번 직장갑질 실태조사에 참여한 최혜인 노무사는 "직장에서 갑질을 당한 피해자들을 상담하다 보면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사례가 많다"며 "단지 '(상사가) 벽을 보고 있으라고 했다' 같은 신고는 분명 갑질로 보이지만 현행 노동법이나 형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전했다.

최 노무사는 "많은 사람 앞에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면박 갑질을 받았다면 '모욕죄'로 고발할 수는 있다"면서도 "이를 위해서는 피해자가 직접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설령 신고하더라도 죄가 성립되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결국 직장인들은 '참는 것'을 택한다. A씨는 "갑질을 외부에 알리더라도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고, 무엇보다 업계가 좁아 재취업이 안될 수 있다는 걱정부터 들었다"며 "그저 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최 노무사는 "현행법 체계로서는 사실상 '직장갑질'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청년들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취업에 성공하고도 갑질에 내몰리는 결과가 나타난다"며 "하루빨리 국회에 계류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dongchoi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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