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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고난’ 반민특위원장 김상덕선생 후손들 힘겨운 투병

납북돼 1990년에야 독립유공자…아들손자 지난한 삶
외아들 김정육씨는 심장병, 손자는 암투병

(서울=뉴스1) 장우성 기자 | 2017-08-15 07:00 송고
독립유공자 김상덕 선생(1892~1956)© News1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폭압에서 해방된 지 72주년이 되는 광복절이다. 하지만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통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장과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1892~1956)의 후손들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선생의 아들과 손자가 병마와 외롭게 싸우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김상덕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약산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과 민족혁명당에서도 활약했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동참하면서 문화부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의원과 반민특위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승만 정부에 협조했던 친일파들을 선처하라는 압력을 거부하다가 위원장직을 자진사퇴한 뒤 6·25 때 납북됐다.    

김상덕 선생이 고향 땅에 남긴 혈육인 장남 김정육씨(82)는 최근 우환이 겹쳤다. 지난해 큰 심장수술을 받은 데 이어 외아들 김모 씨(38)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자신의 몸도 성치 않은데 만삭의 며느리와 어린 손녀 대신 아들의 간병을 도맡는다. 혼자 사는 아버지가 눈에 밟혀 무리를 해 더 큰 아파트를 마련했던 아들이었다. 지난해 김정육씨는 심장수술을, 아들은 암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이었다.    

김정육씨의 고단한 삶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애달픈 현실을 보여준다. 김씨는 김상덕 선생이 화려한 독립운동 공적에도 반민특위위원장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눈 밖에 난데다가 납북됐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부모 없이 고학 끝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번듯한 직장은 얻기 어려웠다. 납북자 가족에게 씌워진 일종의 연좌제였다. 입사시험에 낙방하기를 거듭하다 취직할 수 있는 나이도 지나버렸다.
40대에 뒤늦게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서 이제 뭔가 달라지는 듯 했지만 그 행복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아내가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병원비와 약값, 병구완의 부담을 홀로 짊어졌다. 막노동까지 해도 형편은 더욱 쪼들렸다. 김상덕 선생이 1990년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받게된 보훈수당도 보탬이 되기에는 턱없었다. 그나마 수당도 온전히 자기 몫은 아니었다. 역시 어려운 형편인 누이(85)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누이는 유공자의 맏아들만 지원하는 규정 때문에 국가적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한다.  

김정육씨 가족을 돕는 친일문제연구가 정운현씨(58)는 최근 주변 사람들과 십시일반해 병원비를 보탰지만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무관심한 우리 사회를 아쉬워했다. 그는 "김정육 선생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유공자 후손의 대표적 사례"라며 "자신도 수술 후유증이 심해 치료를 받아야할 처지인데 아들의 병수발까지 들어 걱정이 된다"고 했다.

반민특위위원장 가문의 가슴아픈 사연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도움의 손길도 전해온다. 서울시 산하 서울시의료원은 수술 후 후유증에 시달리는 김정육씨를 특별 진료해주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체계적으로 돕는 방안도 검토할 계획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때마침 광복절을 앞둔 14일 독립유공자 유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점심을 하면서 "독립유공자 3대까지 합당한 예우를 받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운현씨는 "문 대통령이 약속을 지킨다면 독립유공자 사회의 숙원을 해결하는 것"이라며 "지원을 제대로 받지못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많다. 정부가 철저하게 실사해 김정육 선생 같이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분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never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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