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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정치에 일류 시민"…'100만 촛불' 대한민국 역사에 남다

문화제·축제 방불…재기발랄한 풍자도
폭력·쓰레기 볼 수 없어…성숙한 시민문화

(서울=뉴스1) 사건팀 | 2016-11-13 13:17 송고 | 2016-11-13 23:21 최종수정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12일 오후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 세종대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2016.11.13/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11.12 촛불집회는 대한민국 역사의 의미있는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주최측이 집계한 촛불을 든 시민은 100만명을 넘었고, 이들은 성숙하고 문화적인 집회·시위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가능케한 1987년 6월 항쟁과 비견되는 이날의 집회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시민들은 비장하게 때로는 발랄하게 기울어진 국가를 향해 제 목소리를 냈다. 100만명이 다녀간 광장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깨끗했으며, 폭력이 발생하거나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뜨거우면서도 차분하게 집회를 마무리하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품위있게 과시했다.

◇문화제·축제 방불케 하는 집회…"삼류 정치에 일류 시민" 

이날 촛불집회엔 역사상 최대 인파인 100만여명(주최측 추산, 경찰 추산 26만명)이 모였다. 서울 외에도 부산 3만5000명, 광주 1만명, 제주 5000명, 대구 4000명 등 전국 10여개 지역에서 6만명이 집결했다고 주최측은 전했다.

집회는 '문화제'이자 '축제'를 방불케했다. 가족·친구·연인들의 손을 잡고 나온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박근혜 하야"를 외쳤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신나는 분위기를 유지했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이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광화문광장에서 진행한 광장콘서트 '만민공동회'에서 평범한 시민들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시국에 대한 발언을 이어가며 큰 환호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동안 새누리당만을 찍었다"고 고백한 한 50대 여성은 "삼류 정치에 일류 시민"이란 말로 박수를 받았다. 

'젊은 친구'들이 나눠줬다는 '하야 방석'을 든 시민 윤모씨(46)는 "(1987년) 6·10 민주화항쟁 때도 이 자리에 있었는데 그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며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마치 '박근혜 하야 페스티벌'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를 꼬집는 시민들의 재기발랄한 풍자는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광화문광장에 자리잡은 학생 김모씨(26)는 말의 입에 닭 인형을 물려 들고 나왔다. 목에 금메달 여러개를 걸고 인형을 든 김씨는 "말이 닭을 삼키는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예술행동단 맞짱'은 박 대통령, 최순실씨 코스프레로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시민들은 몸에 부적을 붙이고 가면을 쓴 박 대통령, 최씨로 분장한 예술인을 때리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지나가던 한 시민은 "최순실이 왜 여기 왔냐"고 놀라 큰 웃음이 터졌다.

이날 오후 5시부터 3시간 가량 도심을 행진한 뒤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모여든 시민들은 노동·청년·지역 등 각계 대표 시민들의 시국 발언에 호응했다. "박근혜는 내려가라" "국민이 주인이다" 등 구호가 도시를 압도했다.

가수들의 공연도 이어졌다. 사회성 짙은 노래를 불러 온 포크 가수 정태춘씨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시민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고, 대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씨는 인기를 얻은 "이게 나라냐"를 불렀다. 오후 9시20분쯤 가수 이승환씨가 전날 각종 음원사이트에 공개한 노래 '길가에 버려지다'를 부르며 등장하자 광화문의 함성은 절정에 달했다.

◇청와대 최근접 내자동 긴장감 고조…빛났던 시민들의 자제력

광장에선 축제 분위기로 고조됐지만 청와대 최근접 지점인 경복궁역 인근 내자동 교차로 인근은 전운이 감돌기도 했다. 이날 오후 5시50분부터 경찰과 집회 참가자 사이에 대치가 시작됐다.

청와대를 목전에 둔 시민들은 "박근혜는 물러나라"를 외쳤고, 일부 시위대는 차벽 위로 올라서거나 넘어가기도 하는 등 한때 긴장감이 고조됐다. 경찰은 차벽 뒤 경력을 늘리고 최루액을 준비하는 등 상황은 일촉즉발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를 자제시킨 것도 역시 시민들이었다. 폭력집회로 번질 것을 우려한 시민들은 차벽 위로 오른 시위대를 향해 "내려와" 등을 외치며 평화집회를 요구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방패를 뺏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다시 방패를 돌려주고 무리에서 이탈한 경찰을 보호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2016 민중총궐기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향하던 중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2016.11.12/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장시간 대치가 이어진 만큼 일부 충돌은 불가피했다. 경찰에 따르면 경찰관 3명은 내자동에서 집회 참가자들과 대치하는 도중 탈진 상태를 보였고 경찰관 1명은 참가자가 던진 백미러에 눈썹 위를 맞아 경상을 입었다. 이밖에 의경 4명 중 3명은 탈진, 1명은 오른팔을 다쳤다. 시민들은 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23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그렇지만 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 모인 집회라는 점을 고려하면 큰 부상은 없이 마무리 됐다는 게 경찰의 평가이다.  

광장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보고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줍고 주변을 정리했다. 경기도 고양에서 왔다는 초등학교 6학년생 김모양(13)은 엄마와 함께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들고 퇴장하는 시민들을 맞았다. 김양은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한자리에 모였는데 쓰레기가 버려지지 않았으면 한다"며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주워 오시는 모습에 기쁘다"고 말했다.

주최 측이 마련한 모금함에는 기부가 쏟아지면서 금세 지폐가 쌓였다. 1만원권 몇장을 선뜻 집어넣은 김중미씨(54·여)는 "촛불집회가 계속 이어져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부했다"고 말했다.

발 디딜틈 없는 인파들이 모였지만 시민들은 어린 아이들이 보이면 편한 자리를 양보하고 음식을 나눠먹는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외신 "한국 집회 놀랍다"…전문가 "끝이 아니라 시작"

외신들은 대한민국 시민들의 집회 문화에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로이터통신은 "가족 단위 참석자도 있고 학생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도 보였다. 노조와 시민단체가 주도했던 이전 시위와는 크게 달랐다"며 "5년 임기를 마치지 못한 한국 대통령은 없지만 박 대통령은 국민들과 야당으로부터 점차 커지는 압박에 직면해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스캔들로 점철된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며 "경찰과 조직위 추산 모두 2008년 광우병 시위 때 공식 8만명을 크게 뛰어넘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집회가 과거 시위보다 확실히 발전된 형태이며 집회 문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송주명 한신대 교수(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는 "100만명이 하나가 되어 '정권퇴진'이라는 요구를 내세우며 광장으로 나온 것은 대사건"이라며 "87년 6월 항쟁 당시 '직선제 개헌'이라는 요구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묵직한 목소리라 볼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송 교수는 "87년 이후 30년이 지났다. 민주화의 장을 열고 스스로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시민들이 의식이 많이 성장됐다"며 "과거 군사정부에 맞서 과격했던 시위보다는 훨씬 의식이 발전된 시위이며 시민들이 깨어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폭력도 길가의 쓰레기도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집회가 끝이 아닌 시작이 될 것으로 봤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12일 오후 서울광장 일대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상여를 멘 농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2016.11.13/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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