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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미생', 현실엔 없는 직장인의 판타지

(서울=뉴스1) 양은하 기자 | 2014-11-10 08:25 송고
위즈덤하우스.© News1
위즈덤하우스.© News1

만화 '미생'(전 9권)은 신입사원인 우리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 장그래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한 한국 기원 연구생이다. 평생 잡고 있던 바둑을 그만두고 지인의 소개, 그러니까 낙하산으로 종합무역상사(대기업) 인턴으로 들어간다. 대학 졸업장도, 영어 점수도 없다.

일벌레가 되기 전 공부벌레였던 우리는 장그래보다 입사 동기 장백기나 안영이에 더 가깝다. 대학 졸업장에 몇천만 원을 들였고 눈 비비며 토익점수를 올렸다. 수많은 자소서와 면접, 탈락의 고배를 거치면서 이미 준비된 '것처럼' 보이는 신입사원이 됐다.

덜컥 회사라는 판에 내던져진 장그래보다 한발 먼저 출발한 우리는 PT 발표, 보고서 작성, 전문 용어에 조금 더 익숙하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장그래는 '성실함'이나 '노력'으로는 감히 따라가지 못하는 특출한 능력을 지녔다. 관찰력이다. 상황을 보고 분위기를 읽는다. 적절한 순간에 빵 터지는 재치로 사건을 해결하고 상사의 신임을 얻는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 박 대리의 기분을 (그가 모르게) 세워 줄 때, 박 과장의 비리를 밝혀낼 때,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하는 요르단 수출 건을 새 프로젝트로 추진할 때 장그래는 신입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활약을 한다.

장그래의 성장에 밑거름이 돼 주는 영업 3팀도 이 세상에 없는 부서다. 올곧고 일 잘하는 오 과장과 의리있는 에이스 김 대리는 고졸인 그를 편견 없이 받아주고, 심지어 부서의 사활이 걸린 사안을 두고 그의 의견을 경청한다.

'미생'이 판타지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길목마다 현실을 심어두었기 때문일 테다. 잦은 회식, 불합리한 지시, 충혈된 눈, 끝없는 업무, 승진을 위한 경쟁, 워킹맘, 비정규직, 비리, 내부고발 등 공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얼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장그래의 계약직 해지는 '미생'이 가장 현실 가까이 뿌리내린 부분이다. 회사의 케케묵은 비리를 들춰내고 전무를 좌천시키는 등 '초'신입적인 능력을 인정받지만 회사는 끝내 그를 정규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극이 아니다. 고비마다 위기를 넘겨 온 장그래에게 작가는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 창업한 오 과장이 함께 일해보자고 제의를 하고 옛 팀을 못 잊은 김 대리가 합류하면서 팀이 다시 꾸려진다.

'미생'은 너무나 현실적인 상황으로 공감을 사고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그 위로가 장그래의 정규직 전환이 아닌 팀의 복귀에 있다는 점에서 무릎을 탁 쳤다. 직장인의 판타지는 어쩌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안전하게 숨을 쉬는 정규직이 아니라 오 차장과 김 대리, 장그래가 있는 영업 3팀을 만나는 것일지 모른다.

스펙보다 사람을 먼저 봐주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선임과 선임의 말과 의도를 스펀지처럼 쑥쑥 빨아들이는 후임, 그래서 함께 일할 맛 나는 팀 말이다.




letit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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