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대선, 전쟁통에 '불발'…국민 84% '선거 치를 때 아냐'

헌법상 선거일은 31일이지만…계엄령 지속돼 무기한 연기
젤렌스키 "운명이 달린 전투"…일각선 '정치적 결정' 지적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31일(현지시간) 키이우 인근 부차에서 러시아 해방 2주년을 맞아 열린 희생자 추모식서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총사령관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24.3.31.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서울=뉴스1) 김성식 기자 = 3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일이 밝았지만,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2년을 넘기면서 선거는 결국 열리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국민 상당수는 아직 선거를 치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계엄령이 내려진 탓에 현지 법상 선거를 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선거 없이 연임하는 데 대해 일각에선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CNN 방송에 따르면 2019년 5월 취임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헌법상 임기 5년 차 3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이날 대선을 치렀어야 했다. 그러나 2022년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된 데다 발발과 동시에 선포된 계엄령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대선은 무기한 연기됐다.

대선을 열려면 계엄령을 일시 해제하거나 관련법을 개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 대다수는 전쟁의 특수성을 이유로 선거 강행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월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KIIS)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9%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계엄령이 종료될 때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계엄령을 일시 해제하거나 법을 고쳐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응답은 15%에 그쳤다.

KIIS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조사에선 '선거를 치를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대선을 미뤄야 한다는 응답이 84%에 달하기도 했다. 이날 수도 키이우의 마이단 광장에 있던 대학생 미콜라 리아핀(21)은 CNN에 "때가 되면 대통령이 물러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서점 직원인 카테리나 빌로콘(42)은 지난 대선에서 젤렌스키 후보를 뽑았고 그의 활약에 만족하고 있다며 현재 대선을 치를 경우 "국가 예산이 낭비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 돈으로 군대를 무장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참전 군인들은 정권 교체 과정에서 자칫 권력 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는 만큼 대선 연기가 현명한 선택이라고 입을 모았다. 드론 부대에서 복무 중인 병사 올렉산드르 보이트코는 "과도기 권력 공백은 군의 위기관리와 국가 기능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대선 실시 여부를 두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입장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는 지난해 8월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수호는 전쟁 중에도 계속돼야 한다"며 대선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3개월 뒤에는 화상 연설에서 "지금은 운명이 달린 전투의 시간"이라며 "선거를 치를 때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집권 여당인 인민의종에 속한 루슬란 스테판추크 우크라이나 국회의장도 이날 CNN에 700만명이 외국으로 피란한 데다 전장에서의 투표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선을 강행할 경우 참정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율이 지난해 12월 KISS 조사 기준 64%를 기록한 만큼 이날 대선이 치러졌더라도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을 거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다만 지난 2월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된 발레리 잘루즈니 현 영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와 같은 제3의 인물이 대통령직에 올랐을 가능성이 있다며 대선을 치르지 않은 것은 잘못됐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현지 시민단체인 우크라이나 유권자회의는 지지율 하락에 직면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치적인 이유로 대선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우크라이나 대선은 미국 정부의 추가 지원에 반대하는 공화당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대선 공화당 경선에 출마했다가 지난 1월 사퇴한 비벡 라마스와미는 지난해 11월 경선 토론회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겨냥해 "선거 취소를 빌미로 미국의 지원을 협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에 호의적인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언의원조차도 지난해 8월 키이우를 방문해 "나라가 공격받을 때에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미국 국민은 우크라이나가 과거의 매우 부패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압박한 바 있다.

seongsk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