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 소문날까봐'…日, 간토대지진 후 조선인 유학생 귀국 막았다
식료품 배급하며 이름부터 소속, 행동거지까지 감시
시위에 대한 경계감 이면에 박해 들킬까 곤란해 하는 이중적 의식 드러나
- 권진영 기자
(서울=뉴스1) 권진영 기자 = 일본이 1923년 간토대지진 발생 직후 조선 출신 학생들을 '구호'한다는 명분으로 감시하고, 조선인 대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이들의 귀국을 막았다는 공문서의 존재가 처음으로 드러났다.
마이니치신문은 4일, 제국주의 시절 일본 문부성이 '조선학생구호부(朝鮮学生救護部)를 설치하고 간토 대지진 피해를 입은 조선인 학생을 조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가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해당 사료는 '간토대지진 피해 상황 조사-(조)선인 구호일건서류'로, 2020년부터 도쿄 지요다구 소재 국립공문서관이 보관 중이다.
그동안 구호부의 존재 자체는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진재사무보고'에 부서명이 남아 알려져 있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조사 활동을 벌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 드러난 사료에 따르면 구호부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하고 아흐레가 지난 9월 10일 처음 업무를 개시했다. 이후 각 출장소를 통해 경시청 등에 조선인 학생에 관한 "지금까지의 취급 방법 및 감시방법"을 청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각 출장소는 재해 피해를 입은 조선인 학생 정보를 정리했는데, 시부야 출장소가 정리한 명부에는 학생의 이름·소속 학교·구호 필요성 외에도 평소 행동거지를 의미하는 '성행(性行)' 표기란이 마련돼 있다.
일부 기숙사에 머무는 피해 학생들에게 쌀, 된장 등을 배급했다는 내용도 있지만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정보를 엿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신주쿠 출장소가 작성한 사료에는 나카노병영(육군 시설)에서 9월 11일까지 시멘트 자루를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은 학생이 귀국을 신청하자, 군인이 "네놈은 도쿄에 있는 조선인 학살을 귀국 후 조선인에게 퍼뜨릴 테니 귀국시키기는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남아 있다.
경시청에서도 조선인의 귀국을 저지하려 한 움직임이 여러 차례 전달한 기록이 확인됐는데, 마이니치는 당시 일본이 "조선 반도 통치에 미칠 영향을 경계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도 학살과 관련된 발언이 나오면 "불온 언동 및 유언비어"로 간주됐다.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에서는 건물 붕괴, 화재 등 2차 재해 혼란 속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됐다. 자경단은 조선인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10엔 50전(쥬엔고짓센)'이라는 말을 따라 해 보라고 한 다음, 발음이 일본인과 다르면 살해했다. 대학살 희생자는 지진 재해로 인한 사망 실종자인 10만5000명의 1%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재일조선인 역사에 정통한 도노무라 마사루 교수는 해당 사료에 대해 '조선인 유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행정당국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며 "그들의 고난과 곤란이 기록돼 있으며 사료로서 귀중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조선인 유학생을) 지원하는 한편 민중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감, 조선인에 대한 박해가 계속 말이 나오면 곤란할 것이라는 (일본의) 의식이 어른댄다"고 분석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사료 행간에서 "배타적 분위기에 휩싸인 당시 도쿄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논평했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학살 책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피하고 있다. 2023년 8월 31일, 마쓰노 히로카즈 당시 관방장관은 국가가 작성한 보고서에 대해 "유식자(전문가)가 집필한 것으로, 정부의 견해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 (학살에 대해) 정부 안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중앙 정부가 책임을 관망하는 판국에 지자체에서 제대로 된 대응이 나올 리 만무하다. 간토 대지진 피해 지역인 도쿄의 수장, 고이케 유리고 지사는 2017년부터 8년 연속으로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realkwon@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