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대신 내드립니다"…상사 무서운 일본인 '퇴사 대행사' 장사진

상명하복 문화 부담…팬데믹 이후 재택근무 늘며 인기
정규직 20만원·시간제 11만원…1년간 1만1000건 문의

ⓒ News1 DB

(서울=뉴스1) 권진영 기자 = "회사에서 가장 늦게 퇴근한 시간이 밤 11시였어요"

매일 사무실에서 기본 12시간씩 격무에 시달렸다는 와타나베 유키 씨(24).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하는 일상의 반복 끝에 남은 것은 다리 떨림과 위장병이었다.

와타나베 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악명 높은 일본의 상명하복 문화 때문에 사직서조차 내지 못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상사가 사직서를 찢는가 하면 근속을 강제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CNN은 사내 갑질과 과로에 시달린 끝에 퇴사 대행사를 찾는 일본 노동자들의 현실을 3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한 인사 전문가에 따르면 퇴사 대행 서비스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팬데믹으로 재택근무자가 늘어나며 인기가 더 많아졌다.

대표적인 퇴사 대행사로는 '모무리(일본어로 "더는 무리"라는 뜻)'가 있다. 이 회사는 노동조합법에 관련 자격증명서를 받은 '노동환경개선조합'과 연계해 기업과 퇴사 교섭을 진행한다.

갑질 상사에게 대신 퇴사를 고해주는 대가는 정규직 기준 2만2000엔(약 20만 원)·아르바이트 등 시간제 근무자는 1만2000엔(약 11만 원)이다.

운영 관리자 가와마타 시오리 씨는 지난 1년 동안 1만1000건에 달하는 문의를 받았다고 했다. 회사 누리집에는 날마다 수십 건의 퇴사 성사 실적이 보고된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사직서를 세 번이나 찢고, 무릎을 꿇어도 고용주가 퇴사를 허락하지 않아 우리를 찾아온다"며, 일각에서는 사직 시도 후 상사가 반복적으로 초인종을 누르는 등 괴롭힘이 뒤따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가와마타는 갑질에 가장 취약한 분야로 식품 산업을, 그다음으로는 의료·복지 산업을 꼽았다.

퇴사 대행사 '모무리'의 누리집 화면 갈무리. 이 회사는 퇴사를 원하는 노동자를 대신해 기업과 퇴직 교섭을 하고 원만히 일을 그만둘 수 있도록 돕는다. 성사 확률 100%를 자랑한다. 2024.09.02/

변호사 전문 사이트 벤나비에 따르면 퇴직 거부는 엄연한 불법이다. 헌법상 보장되는 '직업 선택의 자유'에는 퇴직할 자유도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상사 및 기업이 퇴사를 빌미로 손해배상 청구를 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경우에는 '파워하라(power harassment·갑질)'로 인정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사내 갑질 및 과로는 오랜 고질병이다. 오죽하면 정부가 나서서 비윤리적 고용주(블랙 기업) 목록을 발표할 정도다. 2017년 처음 목록이 발표된 이래 전국 노동국이 370개 이상의 회사를 고발했다.

아울러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업무로 인한 뇌·심장질환으로 숨진 노동자는 54명이었다. 20년 전의 160명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으로 준 셈이다. 하지만 직장에서 정신적 피해를 보고 있다며 보험금을 청구하는 이들의 수는 같은 기간 동안 7배 이상 늘어났다. 2022년 기준 보험금 청구자는 2683명에 이른다.

한편 일부 노동 전문가는 "요즘 젊은이들은 더 비대립적"이라며 "청년 근로자들은 상사와 접촉하지 않고 그만두는 것을 선호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에 가와마타는 모무리 역시 퇴사 대행이 사회에서 사라지길 바란다면서도 "상사에게 직접 말하는 게 최선이지만 고객들의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 사업이 곧 소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realkw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