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자고" 100년 일본 위스키 역사 떠받친 산토리의 정신[딥포커스]

1호 위스키 하쿠사쓰의 좌절…재고 숙성시킨 가쿠빈으로 대박
일본산 미즈나라 캐스크에 끝없는 테이스팅…ISC 수상으로 이어져

일본 오사카부 시마모토 시에 있는 산토리의 증류소. (출처 : 산토리 누리집) 2023.10.31/

(서울=뉴스1) 권진영 기자 = 아이리쉬·스카치·아메리칸·캐네디언 위스키와 더불어 세계 5대 위스키로 꼽히는 재패니즈 위스키. 재패니즈 위스키의 역사가 시작된 산토리의 야마자키 증류소가 지난 10월1일부로 100주년을 맞이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위스키 불모지였던 일본이 어떻게 하이볼의 나라가 되었는지 산토리의 역사를 총 정리해 31일 보도했다.

◇첫 술에 배 부르랴…시간과 끈기로 빚어낸 대표작

위스키를 처음 일본에 맛보인 이는 1853년 흑선을 타고 등장한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다. 그는 류큐 왕국(現 오키나와)과 도쿠가와 막부의 우라가(浦賀)에서 반가움의 뜻으로 위스키를 대접했다.

직접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1923년의 일이다. 산토리의 아버지, 창업자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郎)는 '고토부키야(寿屋)'라는 양주점을 열고 '아카타마 포트와인'을 출시해 대박을 쳤다. 와인으로 성공한 돈을 쏟아부어 세운 것이 바로 오사카부에 위치한 야마자키 증류소다.

제조를 위해 도리이는 스코틀랜드 유학파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政孝)를 기용했다. 대졸 신입 사원의 첫 월급이 40~50엔이던 시절, 10년 임기에 연봉 4000엔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모신 귀한 인재였다. 다케쓰루는 계약 종료 후 지금은 홋카이도 지역을 대표하는 '닛카 위스키'를 창업했다.

1929년, 이윽고 1호 재패니즈 위스키 '하쿠사쓰(白札)가 출시됐다. 고객의 반응은 싸늘했다. "탄내가 난다" "연기 냄새가 난다"는 혹평에 전혀 팔리지 않았다. 자금이 바닥을 찍고 재료 매입마저 불가능해진 1931년에는 제작된 술통조차 없을 정도다.

하지만 재고로 남은 위스키 주정(酒精·스피릿)을 숙성시켜 1937년 출시한 '가쿠빈(角瓶)'이 대히트를 치며 전화위복이 됐다. 지금은 매출 1위, 산토리의 얼굴과도 같은 대표 상품이 됐다.

산토리 가쿠빈과 창업주 도리이 신지로. (출처 : 산토리 누리집) 2023.10.31/

◇산토리만의 특색 만들어낸 창업주의 "가보자고" 정신

묵혀둔 재고가 어쩌다 보니 대박난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에 지지않는 일본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창업주의 "가보자고" 정신이 빚어낸 술이다.

산토리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창업주 도리이는 '얏테미나하레(やってみなはれ)'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어디 해 봐라"라는 뜻으로, 지금은 '얏테미나하레 정신'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산토리는 도리이를 '어떤 곤경에 빠지더라도 자신과 그 작품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고, 계속 비난받더라도 활기차게 창의적인 생각을 발휘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도리이의 정신은 2대 사장인 사지 게이조(佐治敬三)에게 계승됐다. 그는 "인간이랑 똑같이 불순물 없이 순수하기만한 녀석은 맛도 볼품없고 재미도 없다"며 증류 과정에서 미묘하게 변하는 불순물마저 맛의 개성으로 승화시켰다.

산토리 위스키의 특징은 2가지 재질의 발효조와 2번 타는 증류기, '포트 스틸'이다.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보리를 부수어 뜨거운 물에 녹인 후 맥즙을 넣는데, 야마자기 증류소에는 목제와 스테인레스제 2가지 발효조가 있다. 이것을 '포트 스틸'이라 불리는 다양한 모양의 구리 증류기에 2번 증류하는 것이 포인트다.

2번 증류된 위스키 원액은 투명한 색으로 알콜 도수는 65~70% 정도다. 나무 통에 넣어 저장 및 숙성하면 위스키가 만들어진다. 나무통(캐스크) 재질은 북미산 화이트 오크, 스패니쉬 오크 외에도 주로 홋카이도산 미즈나라(물참나무) 등을 쓴다.

원래 산토리는 유럽 등에서 나무를 수입해 통을 만들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물자 공급이 어려워지자 국산 대체제를 찾던 중 미즈나라를 발견했다. 이 역시 얏테미나하레 정신이 발휘된 사례로, 대체재로 사용되기 시작한 미즈나라 캐스크는 오늘날 위스키에 희소가치를 더해주는 요소가 됐다.

◇1000조분의 1의 맛과 향까지 구별한 초미세 블렌드

150여개의 증류소가 운영되는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와는 다르게 일본은 증류소 수 자체가 적다. 서로 주정을 사고파는 관례도 없어 상대적으로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들기 어려운 환경이다. 야마자키 증류소가 원료, 발효조, 증류기, 캐스크 재료 조합에 따라 다양한 주정을 자부담으로 준비해 두는 까닭이다.

주정을 관리해 배합하는 '블렌더' 역할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총책임자 격인 '마스터 블렌더'는 도리이 창업주가 1대를, 사지 사장이 2대를 맡았으며 도리이 싱고 산토리 홀딩스 부사장이 3대를 맡고 있다.

싱고 부사장 가라사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맛과 향의 농도는 1000조분의 1인 ppq"가 한계다. 지난 10월 중순, 지바에서 열린 IT 전시회에 소개된 최신형 측정기가 잴 수 있는 농도는 1조분의 1인 ppt단위까지였다. 닛케이는 "기계로는 구별해낼 수 없는 인간의 미세한 감각이 재페니즈 위스키를 만들어낸 셈"이라고 논평했다.

산토리는 야마자키, 하쿠슈 증류소, 산토리 홀딩스 본사, 뉴욕 등 세계 각지에 7개의 테이스팅룸을 두고 있다. 테이스팅룸에서는 삼키지 않고 맛만 보고 뱉어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다.

영국 인터내셔널 스피릿 챌린지(ISC)에서 금상을 수상한 야마자키 12년산 (출처 : 산토리 누리집) 2023.10.31/

이같은 인고의 도전과 노력 끝에 산토리는 '야마자키 12년산'으로 지난 2003년 영국 인터내셔널 스피릿 챌린지(ISC)에서 일본 위스키로는 처음으로 금상을 획득했다. 이 성과는 일본 위스키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2021년에는 일본양주주조조합이 '재패니즈 위스키'의 정의를 맥아,곡류, 일본에서 채수한 물로 일본 증류소에서 제조해 700리터 이하의 목제통에 담아 일본에서 3년 이상 숙성한 것으로 지정했다. 정식 시행기간은 2024년 4월부터다.

한편 통계로 따지면 일본 위스키의 전성기는 1983년이다. 30만㎘(킬로리터) 이상이 팔렸다. 1㎘는 1000리터에 해당한다. 이후에는 과일맛의 탄산주 '츄하이'가 인기를 끌며 2007년까지 판매량이 3분의 1토막 아래로 감소했다.

25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서 시민들이 위스키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이마트는 이날 발베니 12년 더블우드 1,200병과 산토리 가쿠빈 8,400병을 한정 수량으로 판매했다. 2023.2.25/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저조한 판매고를 반등시킨 해결사는 하이볼이었다. 산토리가 고안한 가쿠빈 위스키에 탄산수를 탄 '가쿠 하이볼' 캠페인에 반응이 터진 것이다. 미즈와리(술에 물을 섞어마시는 것)나 하이볼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취향을 저격한 마케팅이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하이볼 열풍으로 곳곳에서 산토리 가쿠빈이 품귀현상을 빚는 일이 발생했다.

realkw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