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 이용 엄두 못 내"…유아차 끌면 매 순간 '고비' [르포]

개롱~회현역, 유아차 끌고 1시간 10분 만에 도착
"아빠든 엄마든 어디라도 편히 다닐 수 있으면"

배영(44)씨가 28일 오전 5호선 개롱역에서 유아차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아기 무게에 따라 유아차까지 하면 20㎏이 훌쩍 넘어가요. 아빠들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들은 오죽하겠어요. 유아차 끌고 대중교통 이용하는 건 엄두도 못 내죠."

(서울=뉴스1) 김정은 기자 = 28일 오전 10시 10분 웬만한 직장인은 모두 출근했을 시간. 5호선 개롱역 4번 출구 앞에서 '라테 파파' 배영 씨(44)를 만났다. 라테 파파란 커피를 손에 들고 유아차를 끄는 육아에 적극적인 아빠란 뜻이다.

9개월 된 아이를 유아차에 태우고 등장한 그는 연신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약속 시간은 오전 10시였지만 아이랑 같이 있을 때면 상수가 돼버리는 변수에 10분 정도 늦어서다.

유아차를 끈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엘리베이터였다. 홑몸으로 내려갔으면 1분밖에 걸리지 않는 계단에서 개찰구 가기까지 엘리베이터를 타느라 5분 남짓이 걸렸다.

배 씨가 유아차를 끌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모습.

개찰구에서도 작은 고비가 있었다. 유아차는 개찰구 밖에 둔 채 아빠만 먼저 카드를 찍고 들어간 뒤 역무원에게 유아차를 통과하겠다고 말해야 했다.

또 휠체어나 유아차가 통과할 수 있는 넓은 개찰구마저도 문은 직접 여닫아야 했다. 휠체어나 유아차를 이용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겐 지하철을 반대로 탔을 때나 급히 허벅지로 밀고 들어갔던 기억이 있는 문이다.

유아차를 밀고 있는 이에겐 당혹스러운 문이었다. 한 손으론 문을 잡고, 한 손으로는 유아차를 끌어오면서 배 씨는 어정쩡한 자세가 됐다. 두꺼운 카디건을 입고 있을 만큼 약간 쌀쌀한 날씨였으나 출발한 지 10분 만에 배 씨는 겉옷을 벗어 던졌다.

배 씨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4호선 환승을 위해 타야 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습.

이날의 목적지는 회현역이다. 회현역은 유명한 '아동복 거리'가 있는 곳이어서 겨울맞이 옷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5호선 개롱역에서 4호선 회현역에 가기 위해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갈아타야 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2·4·5호선 환승구간으로 혼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출퇴근 시간을 피했건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4호선 환승을 위해 타야 하는 엘리베이터 앞에는 20명 내외의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데만 10분이 지났다. 엘리베이터를 2번 보내고 나서야 줄 앞쪽으로 올 수 있었다.

3번째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인파가 또 한 번 쏠렸다. 너도나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몰려들면서 '3번째 엘리베이터마저 보내야 하나'라는 생각하고 있을 때쯤 '정의의 사도'가 나섰다. 한 할머니가 "아가 먼저 타게 해라"라고 외치면서다. 그의 한마디로 마침내 유아차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배 씨가 유아차와 아이를 들고 버스를 타는 모습.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4호선에선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랑 같이 와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사와 지하철 간 공간이 너무 넓어 유아차를 번쩍 들어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와 지하철 사이 공간은 성인 여성 발 하나가 '쑥' 들어갈 만큼 넓었다.

1시간 10분이 걸려 회현역에 도착했다. 네이버지도 기준으로 50분이면 올 거리였다. 회현역 아동복 거리에서 옷을 구매한 뒤 '육아 동지' 김기탁 씨(42)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이용해 광화문으로 이동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이 아니었을뿐더러 저상 버스였기에 유아차를 손쉽게 오르내릴 수 있었다. 물론 이조차 '아빠'기에 쉬워 보이는 거였다.

광화문에 도착하니 낮 12시가 훌쩍 넘어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아야 할 시간이 됐다. 근처 가장 큰 건물인 세종문화예술회관에 들어가기로 했다. 1층 화장실 기저귀갈이대는 '장애인 화장실' 1곳에 설치돼 있었다.

아이들이 칭얼대기 시작했으나 야속하게도 장애인 화장실은 한 비장애인이 사용하고 있었다. 15분쯤 기다렸을까. 앞 이용자가 나오고 그제야 급히 들어가 기저귀를 갈 수 있었다.

배 씨가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다.

그나마 이렇게 기저귀갈이대가 1대라도 설치돼 있는 상황이 다행이라고 했다. 김 씨는 기저귀갈이대가 없어 남자 화장실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아이를 눕혀 기저귀를 갈았던 '무용담'을 덤덤히 꺼내놓기도 했다.

개롱역에서 회현역, 광화문까지의 여정에서 배 씨는 연신 "아내가 이 길을 혼자 왔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들은 대중교통을 혼자 이용하는 걸 애초에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고. 아빠든 엄마든 어디라도 편히 다닐 수 있는 그날을 배 씨는 기다린다고 했다.

1derland@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