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 대신 음식 나눠준 경찰"…한강 노벨상 5·18 숨은 영웅 재조명

[김민수의 경찰본색] 계엄군 강경진압에 반대한 안병하 치안감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받고 불명예 퇴직…후유증으로 끝내 사망

편집자주 ...영화 '영웅본색'의 팬 사회부 사건팀 김민수 기자가 '경찰본색'을 연재합니다. 본색이란 본디의 생깔이나 정체, 특색을 말합니다. '경찰 본색'은 범인을 잡고 시민을 지키고 범죄 혐의를 밝혀내는 '경찰다움'을 의미합니다. 내년 창설 80주년을 맞는 경찰의 역사에서 경찰다운 '본색'이 드러난 결정적 순간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故 안병하 치안감 흉상 모습.(전남지방경찰청 제공)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소년이 온다' 中-

(서울=뉴스1) 김민수 기자 = 지난 10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구절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이 작품에 대해 한강 작가는 '매일 울면서 썼다'고 회고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5·18이 재조명되면서 함께 회자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안병하 치안감이 그 주인공이다. 공교롭게도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날은 그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그는 5·18 당시 전남도경찰국장(이하 국장)으로 재직하며 윗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강경 진압과 발포 명령을 용기 있게 거부한 인물이다.

안 국장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무 유기와 지휘 포기 책임을 물어 직위에서 해제됐다. 계엄 당국은 즉시 그를 서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연행, 고문을 자행했고 강제 사직을 종용했다. 이후 수년간을 신부전증 등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8년 10월 10일 사망했다.

"시위 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라"

1979년 10·26사건 후 비상계엄이 내려졌다. 이후 사회 각계에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12·12 군사 반란으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이듬해 5월 학생 시위 규모가 점점 커졌다.

육군사관학교 8기인 안 국장은 6.25 전쟁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한 전쟁영웅이었다. 1962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총경 특채로 경찰관이 됐다. 부산 중부경찰서장과 서울 서대문경찰서장 등을 거쳐 1979년 2월에는 전라남도경찰국장이 됐다.

1980년 5월 17일 0시 전후로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배치됐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경찰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군이 치안에 개입한 것이다. 5월 17일 자정 내려진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한창 무르익던 민주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안 국장은 경찰들에게 '안전한 집회 관리'와 '시위 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치안본부를 통해서 '강경 진압'을 독촉받았음에도 자칫 시민과의 충돌로 경찰 희생자가 나오면 계엄군이 이를 강경 진압의 빌미로 삼을 것을 우려했다.

계엄군이 강경 진압에 나서자 안 국장은 5월 19일 결단을 내렸다. 그는 경찰 보유 총기와 실탄을 31사단으로 옮겨 소산(燒散·태워서 흩어버림)시키라고 명령했다. 시민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였다.

신군부 지휘부는 공수부대 투입 및 증파를 결정했다. 아울러 전남 경찰에 대해 강경 진압을 계속해서 독촉했다. 그럼에도 안 국장은 '주동자 검거와 채증 활동'을 중단하고 부상자 치료와 연행자들의 음식 제공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계엄군 압박에도 "경찰이 시민에게 무기 쓸 수 없다"

1980년 5월 21일. 금남로에는 수많은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오후 1시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하자, 안 국장은 경찰을 퇴각시키기로 했다. 경찰은 비무장 상태로 시내를 빠져나갔다. 철수 과정에서 시민군과 경찰 간 충돌은 없었다.

24일 안 국장은 다시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이때 안 국장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시민군들이 광주경찰서를 경비까지 서면서 지키고 있었다. 어찌 보면 시민군의 눈에 경찰은 엄연히 '진압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안 국장은 시민들의 미움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 국장은 별다른 제지 없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5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했다. 이때 동행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자신의 육사 동기이기도 한 안 국장에게 "경찰이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접수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안 국장은 "경찰은 시민군의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어떻게 시민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면서 진압할 수 있겠나"라고 거절했다.

다음날인 26일, 안 국장은 결국 치안본부 요원에 의해 서울 동빙고 분실에 위치한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다. 8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사표를 낸 조건은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었다. 정신적 충격과 고문 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 생활을 한 그는 결국 1988년 10월 10일 사망했다. 향년 60세였다.

안병하 치안감이 1988년 별세 직전 남긴 비망록 중 일부. 서두에 "광주시민에게감사'라는 문구가 적혀있다(안병하기념사업회 제공)

사망 직전 남긴 비망록 "광주시민에게 감사"

안 국장은 1988년 사망 직전 6쪽 분량의 비망록을 남겼다. 비망록은 "광주시민들에게 감사"라는 말로 시작한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의 원인으로 △과격한 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로 시민 자극 △악성 유언비어 유포로 시민들은 극도로 자극 △김대중 씨 구속으로 자극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휘 책임을 지고 일반적으로 퇴직당한 간부 명예퇴직' 명단을 남겨 자신과 부하 경찰들의 명예 회복을 간절히 바랐다.

1993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광주에서 함께 근무했던 이들이 안 국장을 명예 회복을 청원했고, '5·18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2003년 1월 21일 국가보훈처에 광주민주유공자로 등록됐고, 2년 뒤엔 국립서울현충원 9묘역으로 이장됐다. 안 치안감은 지난 2017년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별승진 추서를 받았다.

그는 지금도 "불의에 맞섰던 정의로운 인권경찰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kxmxs410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