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다" 경복궁 낙서 테러범과 뱅크시가 다른 이유[이승환의 노캡]

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가 1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 이르핀을 방문해 익명의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가 포격에 무너진 담벼락에 그린 '리본 체조 하는 우크라 소녀' 벽화를 관람하고 있다. 2023.02.16.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성식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그라피티는 한국어로 '낙서화'라 불린다. 거리 벽면에 주로 스프레이를 뿌려 완성하는 예술 장르다. 현존 최고의 그라피티 작가는 뱅크시(49)다. 영국 브리스틀 출신인 그는 작품을 통해 반전주의·반자본주의·무정부주의를 과감하게, 또는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불법 논란 잠재운 '실력'

지난 2018년 10월 영국 런던의 소더비경매장이었다.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경매에 부쳐졌다. 어린 소녀가 빨간 하트 모양의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그림이다. 원래는 2002년 런던 쇼디치에 있는 인쇄소 벽에 그려졌다가 2014년 지워졌다. 소더비경매에 나온 것은 회화로 복원한 작품이었다.

뱅크시는 이 작품이 104만 파운드(당시 환율 15억원)에 낙찰되는 순간 액자 내부에 미리 설치한 파쇄기를 작동시켜 그림 절반을 파손했다. '소더비경매'로 요약되는 현대 미술시장의 허세와 사치를 마치 파쇄하듯 질타하고 조롱하는 퍼포먼스였다.

1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도시문화를 주제로 열린 아트페어 어반브레이크 아트아시아(URBAN BREAK Art Asia)에서 시민들이 세계적으로 어반 스트리트 아트를 대표하는 작가 뱅크시의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2020.11.12/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누구보다 현대미술의 풍토에 비판적이지만 뱅크시는 현대 미술계에서 환영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파손된 '풍선과 소녀'는 3년 뒤 '사랑은 휴지통에'라는 제목으로 경매에 나왔다. 낙찰가는 기존 낙찰가보다 18배가량 뛰어 1860만 파운드에 달했다.

뱅크시는 한 번도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애초 '익명'으로 활동했던 것은 그라피티가 불법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법 논란을 잠재운 것은 그의 '실력'이었다. 뱅크시는 일반 관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어구를 사용해 그라피티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과거 대부분의 그라피티는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로 조합돼 마니아가 아니면 즐기기 힘들었다.

학계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행동주의·투쟁주의 예술'의 방향으로 제시한 '권력에 갇혀 있지 않은 예술'로 뱅크시의 작품을 해석하는 논문이 등장했다. 대중도 즐길 수 있고, 학자도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가가 뱅크시인 셈이다.

런던에서는 그런 그의 작품이 그려진 표지판을 절단해 훔쳐 간 20대 남성이 체포됐다. 오늘날 뱅크시의 그림은 국가에서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반달리즘과 브랜달리즘

최근 경복궁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낙서했던 10대 2명과 20대 1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20대 피의자인 설모씨는 범행 후인 20일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자신의 낙서를 "예술로 봐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2019년 미국에서 결성된 예술가 그룹) 미스치프가 말하는 짓궂은 장난을 좀 치고 싶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경복궁 담장을 스프레이로 낙서해 훼손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 임 모군(왼쪽)과 이를 모방해 2차로 훼손한 설 모씨가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해 각각 법정과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 2023.12.22/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그는 또 "제 전시회 오세요. 곧 천막 쳐지고 마감될 것"이라며 범행 직후 찍은 '인증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 예술가 지망생으로 추정되는 설씨는 22일 문화재보호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설씨의 자칭 예술이 뱅크시의 '작품'과 다른 건 무엇일까? 전자는 '반달리즘'으로, 후자는 '브랜달리즘'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반달리즘은 문화재를 훼손·파괴하는 행위다. 브랜달리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영향력 확대에 저항하는 것이다.

미학적 가치도, 사회적 메시지도 담아내지 못한 설씨의 낙서는 예술에 이르지 못하고 반달리즘 취급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 승부하지 못하는 예술가가 객기를 부린다면 '예술가 호소인'으로 전락해 수난을 겪을 수 있다.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현실이다.

이승환 사회부 사건팀장

mrl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