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노린 경찰, 사업가 납치 살해…아내는 8년째 '응징' 몸부림

필리핀서 한인 희생…두테르테까지 나서 처벌 약속[사건 속 오늘]
부패한 경찰 조직 잡혔으나 도주 석방…머문 아내 "한 풀고 싶다"

(MBC 'PD수첩')

(서울=뉴스1) 김송이 기자 = 오늘은 2016년 10월 18일 필리핀 앙헬레스의 한인타운에서 납치·살해된 고(故) 지익주 씨의 8주기다. 당시 외출했다 집에 돌아온 지 씨의 아내 최경진 씨는 처음에 집이 엉망인 것을 보고 단순 도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최 씨는 곧장 남편에게 연락했으나 남편과는 밤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저 사람 끌려가서 죽는 거 아냐?"…앞집 교민이 찍은 영상

다음날 최 씨는 이웃 교민이 촬영한 영상을 받아보고 충격을 받았다. 맞은편 대각선 집에서 찍힌 영상에는 남편이 대낮에 집 앞에서 여러 괴한에 의해 강제로 차에 태워지는 모습이 담겼다. 지 씨가 납치당하는 걸 본 교민은 너무 무서워서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고 했다.

실종 4일 차, 남편을 끌고 간 괴한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어 최 씨가 막막해하던 중 가정부가 한 방송에 구조를 요청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잡혀갔다가 간신히 풀려났다고 했고, 납치범에 대해 묘사하며 '작은 배지'와 '경찰'이라는 단어를 봤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최 씨가 경찰에 신고하고 주변을 수소문해 봐도 남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남편이 경찰에게 체포되기라도 한 건지 최 씨는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필리핀의 교도소를 샅샅이 뒤졌지만 소용없었다.

한인사회에서는 '지 씨가 카지노를 드나들다가 빚을 졌다', '불법 도박 업체에 인력을 대줬다' 등의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지 씨는 필리핀 정부의 허가를 받은 작은 인력 파견 업체를 운영하는 평범한 사업가였다. 직원과 지인들은 반듯한 지 씨가 불법적인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MBC 'PD수첩')

아내가 돌려보고 또 돌려본 CCTV

최 씨는 남편이 납치될 때 태워졌던 남편의 검은색 차의 흔적을 뒤쫓았다. 주변 CCTV 수십 대를 전부 뒤진 최 씨는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오던 남편의 차를 미행하는 차를 발견했고, 범인의 차 번호를 필리핀 경찰청 납치전담반에 넘겼다.

하지만 수사에 진전은 없었고, 최 씨는 답답한 마음에 600만 원을 들여 오토바이 50대를 동원, 남편의 차를 찾아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던 중, 마침내 범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납치 13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범인은 남편 몸값 500만페소(약 1억 원)를 요구하는 협박 문자를 보내왔다.

절박했던 최 씨는 친척들에게 연락해 1억 원을 빌렸고, 교민 2명에게 부탁해 접선 장소 주변에서 범인을 촬영해달라고 했다. 최 씨는 납치범의 지시대로 한 쇼핑몰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돈을 두고 내린 뒤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길거리에 삼륜차와 오토바이가 쏟아졌고 혼돈을 틈타 순식간에 돈가방이 사라졌다.

(MBC 'PD수첩')

무심했던 韓 경찰과 대사관…결국 아내가 직접 알아낸 범인은 '필리핀 경찰'

최 씨는 우리 정부의 도움을 구했지만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 경찰 '코리안 데스크'와 대사관은 '여력이 없다', '개인 통역은 본인이 구해야 한다' 등의 답변을 내놓을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최 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필리핀 현지 매체를 찾았고,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자 그제야 수사에 진전이 있었다.

최 씨는 남편이 납치된 지 석 달이 다 돼가는 시점이 돼서야 남편의 소식을 알 수 있었는데, 이를 알려준 건 필리핀 경찰도 우리 정부도 아니었다.

최 씨가 고용한 탐정은 남편이 피살됐다며 범인은 다름 아닌 필리핀 현직 경찰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했다. 놀랍게도 최 씨는 납치되던 날 마닐라에 있는 필리핀 경찰청 본청으로 끌려갔던 것이었다.

(MBC 'PD수첩')

경찰 고위층에 숨어있는 진짜 범인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리자 납치범 한 명이 스스로 경찰에 출두했는데, 그는 마약 단속반 경찰관 로이 빌레가스였다.

로이 빌레가스는 누군가가 건넨 끈으로 최 씨를 살해했다고 자백하며 역시 마약 단속반 경찰관인 산타 이사벨을 공범으로 지목했다.

최 씨가 확보한 CCTV 영상에는 산타 이사벨이 지 씨의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는 모습이 찍혀있었고, 지 씨의 차를 미행하던 차도 산타 이사벨 아내의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교도소에 구속 수감된 산타 이사벨은 사건의 주모자가 자신의 상관이자 마약 단속반 팀장인 라파엘 둠라오라며 그가 모든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사건에 개입한 건 팀장이 끝이 아니었다. 더 윗선이 개입됐다며 산타 이사벨은 사건에 연루된 고위 경찰들의 이름들을 보여줬다.

필리핀 경찰은 조직적인 상납 고리를 통해 고위층의 보호 속에서 납치 사업을 운영하고 있던 것이었다.

지 씨의 사건이 알려지면서 필리핀에서는 경찰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두테르테 대통령은 사태 수습을 위해 최 씨를 직접 만나 사과하고 범인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말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핀에서는 한국 조직폭력배가 필리핀 경찰을 고용해 지 씨를 납치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애먼 교포들이 지 씨 살인의 용의자로 체포됐고, 이에 필리핀 정부가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MBC 'PD수첩')

풀리지 않은 한…필리핀을 떠날 수 없는 아내

곧 재판이 시작됐으나 1심 재판 결과가 나오는 데에는 무려 6년이 걸렸다. 납치·살해 후 7년이 지난 2023년 6월, 산타 이사벨 등 공범 2명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하지만 제일 처음 자수했던 빌레가스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필리핀에는 결정적인 증언을 하면 죄를 사면해 주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후로 지목된 윗선 역시 모두 무죄 방면됐고, 결과에 큰 충격을 받은 최 씨는 그날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후 지난 6월 항소심에서 마약단속국 팀장 라파엘 둠라오가 이례적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법원이 체포영장을 발부하기 전 도주해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여전히 필리핀에 남아 홀로 살고 있는 최 씨는 tvN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에 출연해 "남편의 억울함을 풀고 싶었다. 제가 필리핀을 떠나면 남편을 두고 가는 것 같아서 한국에 돌아가기가 그렇다"며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tvN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syk1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