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앞 90분 기다리다 '여성' 나타나자 골라 살해
"여성들에게 당했다" 망상…강남역서 남자 6명은 '통과'[사건속 오늘]
현장검증 땐 "담담하다" 재판 땐 "내가 이렇게 인기 있나"…징역 30년
- 소봄이 기자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대한민국에서 남녀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사건이 8년 전 강남역에서 발생했다.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 5분쯤, 서울 서초구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에 있는 건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
같은 해 10월 14일, 1심 선고 공판에서 범인 김 모 씨(당시 34)는 징역 30년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이 원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닌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 내렸다.
이후 강남역에서는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았다'며 여혐 범죄 규탄 집회가 열렸고, 반대편에서는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말라'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남녀 갈등이 도드라지게 됐다.
사건 발생 인근 식당에서 일하던 김 씨는 전날인 5월 16일 오후 5시 40분쯤 조퇴하면서 주방에서 흉기를 챙겼다. 이어 지하철을 타고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건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2시간 정도를 머물렀다가 오후 11시 41분에 사건이 발생한 건물에 숨었다.
김 씨는 약 50분간 건물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범행을 준비했다. 그가 범행을 저지르기 전 남성 6명이 화장실에 출입했으나, 이들에겐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
사건 당일 오전 1시 5분쯤, 김 씨는 남자 용변 칸에 앉아 대기하다가 피해자 A 씨가 들어오자 가슴 부위를 흉기로 마구 찔러 살해했다. 김 씨는 범행을 위해 화장실에서 무려 1시간 30분 동안 대기했다.
이날 A 씨는 남자 친구,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던 중 변을 당했다. 당시 A 씨의 지인은 화장실에 간 A 씨가 20여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찾으러 갔다가 살해당한 A 씨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A 씨가 호송되는 과정에서 뒤따라가던 남자 친구는 화장실 앞 계단을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쳤고, 주저앉아 땅을 치며 오열하는 모습이 CCTV에 고스란히 포착됐다.
경찰은 사건 현장 부근 CCTV 영상을 분석해 사건 인근 음식점 종업원인 김 씨를 용의자로 결론 내리고, 사건 발생 약 10시간 후인 오전 10시쯤 잠복 끝에 출근하던 김 씨를 검거했다.
김 씨는 범행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를 갖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그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약 6시간 만에 인정했다.
검거 당시 김 씨는 일면식 없던 A 씨를 무참히 살해한 범행 동기에 대해 "평소 여성들이 날 무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여성 혐오 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후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일반 여성들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고, 여성혐오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로부터 실제 피해를 봤기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프로파일러를 투입해 김 씨의 심리를 종합 분석한 결과, 전형적인 피해망상 조현병(정신분열증)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르면 김 씨는 2003~2007년 "누군가가 나를 욕하는 것이 들린다"고 자주 호소하며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다. 이 증세는 2년 전인 2014년, 김 씨가 한 집단에 소속되면서 '여성들이 나를 견제하고 괴롭힌다'는 피해망상으로 이어졌다.
김 씨는 프로파일러에게 여성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근거로 "여성들이 내가 일하러 갈 때 의도적으로 지하철에서 천천히 걸어 날 지각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사건 발생 약 10일 전 일하던 식당에서 위생 상태가 불결하다는 지적을 받고 주방 보조로 옮기게 되자, 여성들의 음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여성들로부터 여러 피해를 봤지만 참았는데 최근에는 일까지 못 하게 되는 등 직업적으로 피해를 당해 더는 못 참겠다고 느꼈다. 이렇게 있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으니 내가 먼저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김 씨는 범행 이틀 전인 5월 15일 불특정 여성을 상대로 한 살인의 뜻을 굳히게 됐다. 그가 일하던 음식점 주변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던진 담배꽁초가 자기 신발에 맞으면서다.
그동안 여성들에게 쌓였던 스트레스와 불만이 폭발한 김 씨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인근 술집 건물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여성 살해를 결심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은 김 씨가 여성에 대한 반감과 공격성을 보인 건 맞지만, 오히려 '내가 여성들에게 피해당하고 있다'는 망상 증세가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했다. 동시에 당시 김 씨가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했다.
검찰이 '여성 혐오 범죄라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김 씨가 과거 한 차례 여성을 사귄 경험이 있고 △성인물을 종종 보기도 했으며 △과거 유흥업소에서 여성과 만나려 했던 적이 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기도 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김 씨 본인도 여성 혐오나 증오 감정은 없다고 여러 차례 진술했으며, 여성을 혐오한다는 자료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김 씨의 피해망상은 정신분열증에서 비롯됐다. 외아들인 김 씨는 부모와 거의 대화 없이 지내는 등 가족과 단절된 생활을 해왔고, 대인관계를 꺼려왔다고 알려졌다.
김 씨는 중학교 시절 비공격적인 분열 증세를 보였고, 2008년 정신분열 진단을 받은 후 2015년까지 4차례나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병무 신체검사에서도 신경증적 장애 4급 판정을 받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범행을 저지르기 넉 달 전인 2016년 1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부터는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 증상이 악화한 상황이었다. 같은 해 3월에는 집을 나와 강남역 일대 건물 계단이나 화장실에서 쪽잠을 자며 생활해 왔다고 한다.
공주 치료감호소에서 약 한 달간 김 씨의 정신감정을 진행했을 때도 피해망상과 환청 등 증세를 보여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특히 김 씨는 검찰 수사를 받을 때 표면적으로는 '미안하다'는 감정을 표시하긴 했으나, 죄의식이나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실제로 김 씨는 현장검증 때 심정을 묻는 말에 "그냥 뭐 담담하다. 차분하다"고 말했다. 이어 "사망한 피해자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은 없다"며 "어쨌든 희생됐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미안하고 송구스럽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부장판사 유남근) 심리로 진행된 1심 공판기일에서 김 씨는 "기자들이 많이 온 것을 보니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고 유명 인사인 줄 몰랐다"고 말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검찰은 김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10월 14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김 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동시에 치료감호와 20년의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도 명령했다.
12월 15일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흉기를 주점에서 가져와 3시간 동안 범행을 준비하면서 대상을 물색하는 등 치밀하고 계획적이고 수법도 매우 잔혹하다"며 재차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국선 변호인의 접견을 거부하며 도움 없이 재판받던 김 씨는 "숨진 여성분에게 면목이 없고 마음이 아프지만, 반성이나 후회 같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며 웃음을 보였다. 그러면서 "한창 강남에 와서 주방보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화가 나서 화장실에서 그런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말했다. 죄책감 없는 태도에 재판부마저 김 씨의 변호인에게 "접견을 꼭 하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이 징역 30년이 선고됐다. 이에 김 씨 측은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범행 당시 정신분열증에 의한 망상에 지배돼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한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7년 4월 13일,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살인 혐의로 기소된 김 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 씨 어머니는 "약한 여자를 고른 거잖아요. 우리 딸 이제 스물세 살밖에 안 됐는데 혼자서 얼마나 살려달라고 애원했겠냐"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후 A 씨 부모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김 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다. 2017년 8월 22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김 씨에게 A 씨 부모가 이미 받은 범죄 피해구조금 7000여만 원을 제외한 5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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