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무소서 김장김치 나눠줍니다"…12년전 살인범이 찾아왔다

여관 종업원 죽이고 주민등록 말소, 떠돌이 생활[사건속 오늘]
주민등록 재발급 받았다가 단서 잡혀…경찰 무료나눔으로 유인

ⓒ News1 DB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두 차례의 공개수배에도 12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살인범이 공소시효를 약 3년 남기고 붙잡혔다.

윤광상 형사의 끈질긴 추적 덕분에 1995년 10월 7일 경기 고양시의 한 여관에서 발생한 종업원 살인사건이 막을 내렸다.

203호서 살해된 채 발견된 여관 종업원…외투 남기고 사라진 범인"

피해자 오 모 씨(당시 68·여)는 아주 오래된 2층짜리 여관에서 일하던 종업원이었다. 이 작은 여관에는 한 달 이상 장기 투숙객들이 많이 머물고 있었다.

여관 인근에 거주하던 오 씨는 사건 당일 오전 9시 30분쯤,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평소처럼 여관으로 향했다.

오 씨는 매일 아침 여관을 청소했는데, 이날은 여관 주인이 출근할 때까지 오 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여관 주인이 직접 1층부터 청소를 하던 중 원래는 열려 있어야 할 203호 문이 잠겨 있어 비상 열쇠를 가져와 열었다가 참변을 목격했다.

오 씨는 흉기로 목을 두 번 찔린 채 살해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203호에 머물던 남성은 오전부터 쭉 현장에서 근무하던 알리바이가 확인됐다.

경찰은 여관 전체를 샅샅이 뒤지다가 사건 현장 바로 옆방이자 빈방이었던 205호에서 증거물을 발견했다.

TV 위에는 뚜껑 열린 농약 든 병이 있었고,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욕실에는 새빨간 핏물이 담긴 대야가 놓여 있었고, 욕조에는 피 묻은 외투가 툭 걸쳐져 있었다. 수건과 발 매트에서도 혈흔이 묻어 나왔다.

범인은 자기 손에 묻은 피 정도만 대야에 씻은 뒤 그 물을 버릴 겨를도 없이 도망간 모습이었다. 어설픈 범행 현장엔 범인의 흔적이 가득했다.

경찰은 범인이 203호에서 오 씨를 살해한 뒤 205호로 넘어가 뒤처리한 걸로 추측했다.

205호 욕조에 남아있던 재킷을 본 여관 주인은 "106호 투숙객의 옷"이라고 단번에 알아봤다.

106호에 머물던 김 모 씨(당시 54)는 이 여관에서 2개월 정도 지낸 장기 투숙객으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지 절뚝거리며 걷는 게 특징이었다.

또 김 씨는 오 씨와 사귀던 사이로, 사건 발생 며칠 전부터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오 씨와 다툴 때마다 "내 말 안 들으면 농약 먹고 너 죽고 나 죽는 거다"라는 식의 협박도 했다고 알려졌다.

이에 따라 경찰은 김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해 추적에 나섰다.

전국 떠돌며 여자들 꾀어내…공개 수배했지만 행방 불명

문제는 김 씨는 핸드폰도, 집도 없었고 전국 각지 여러 숙박업소를 옮겨 다니면서 떠돌이 생활을 해 주민등록이 오래 전부터 말소된 상태였다.

사건 당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김 씨는 사건 전날 동료들에게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거다. 수원으로 갈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고.

특히 건설 현장 팀장에게는 "평택에 내려가야 하니 10만원만 빌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 씨가 도망갈 생각을 하고 계획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사건이 추려졌다. 평택은 김 씨의 말소된 주민등록상의 마지막 주소지였다.

하지만 이곳엔 김 씨와 관련된 사람이 살지 않았고, 수원 역시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김 씨의 고향인 전라남도를 찾아가자, 마을 주민들은 김 씨가 군대를 다녀온 이후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전했다.

이웃 마을에 사는 김 씨의 유일한 가족인 누나는 "동생과 소식이 끊긴 지 3년 정도 됐고, 어떤 안경 쓴 여성과 같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간 게 마지막"이라고 했다.

경찰의 탐문이 계속됐지만, 김 씨가 워낙 떠돌이 생활을 한 탓 그가 일한 곳이나 머문 곳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경찰은 평택에서 김 씨와 10년간 동거하며 지낸 사실혼 관계의 여성 A 씨를 만날 수 있었다. A 씨는 김 씨와 헤어진 지 1년 됐다며 김 씨 몰래 도망쳤다고 털어놨다.

알고 보니 김 씨는 전국 곳곳에서 일하면서 혼자 사는 여성들을 만나왔고, 처음에 잘해주며 환심을 사다가 연인이 됐다 싶으면 바로 동거하자고 꼬드긴 뒤 숙식을 해결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김 씨와 만난 여성들은 그가 무섭다며 "술만 마시면 때리고 원하는 걸 해주지 않으면 손부터 날아왔다"고 입 모아 말했다. A 씨 역시 같은 피해자였다.

이에 김 씨는 주거지 없이 떠돌이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김 씨를 공개 수배하는 등 끈질기게 추적했지만, 결국 사건 발생 3개월 만에 수사본부가 해체되면서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KBS 갈무리)

매일 전산망에 범인 이름 검색한 형사…12년 만에 찾아 미끼 던졌다

사건은 과학수사대로 넘겨졌다. 김 씨를 쫓던 윤광상 형사는 포기하지 않고 비번이나 휴가 때마다 김 씨가 과거에 머물렀던 지역을 수시로 찾아갔다.

그러다 윤 형사는 김 씨가 주민등록을 다시 살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매달 전산망에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전산망에서 김 씨의 이름을 확인하던 윤 형사는 사건 발생 12년 만인 2007년 9월, 충남 천안에서 김 씨의 주민등록이 회복된 사실을 알게 됐다.

김 씨는 천안 중앙시장 일대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윤 형사는 다음 날 바로 휴가를 내고 김 씨를 잡으러 갔다.

윤 형사는 김 씨의 주소지 근처를 찾아가 일주일간 잠복했으나, 김 씨가 나타나지 않아 검거에 실패했다. 그때 우편함에 꽂혀 있던 휴대전화 요금 청구서가 윤 형사 눈에 들어왔다.

통화 내역을 살펴보니 모두 동사무소 사회복지과에 전화한 기록이었다. 윤 형사는 동사무소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은 뒤 김 씨가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해 보조금 문제로 통화를 나눴다는 정보를 얻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김 씨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윤 형사는 이대로 김 씨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해 한 가지 묘수를 떠올렸다. 김 씨가 제 발로 찾아오게 하는 방법이었다.

마침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수급자한테 물품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이에 윤 형사는 동사무소 직원과 '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 김장 김치를 제공한다'는 작전을 짜고 김 씨를 유인했다.

윤 형사는 동사무소 주변에 숨어서 기다렸다. 2007년 11월 21일 오후 4시 30분, 택시 한 대가 동사무소 앞에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남자는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었다. 김 씨였다.

(KBS 갈무리)

공소시효 3년 남기고 체포…김 씨 "속이 후련하다" 범행 인정

윤 형사는 곧바로 김 씨에게 달려들어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한 뒤 "12년 전 살인사건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라며 수갑을 채웠다.

당황하던 김 씨는 곧바로 범행을 인정하면서 "속이 후련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윤 형사의 전략에 걸려든 김 씨는 12년 만에 살인 혐의 용의자로 검거됐다.

당시 김 씨는 "노숙자 생활을 한 12년 가까이 했다. 그래서 제 다리엔 관절하고 뼈만 남았다. 팔도 지금 힘을 못 쓴다. 근데 주민등록을 하면 혜택을 본다고 하더라"라며 동정심에 호소했다.

이어 '처음부터 죽이려고 준비했냐'는 물음에 "아휴, 마음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김 씨는 오 씨가 혼자 사는 걸 알고 동거를 제안했다. 그러나 오 씨가 이를 거절하면서 헤어지자고 하자, 청소하러 들어간 오 씨를 뒤따라가 말다툼을 벌였다.

이후 김 씨는 오 씨 앞에서 농약 마시는 시늉을 하며 같이 죽자고 협박했고, 그래도 통하지 않으니까 미리 준비한 흉기로 살해한 것이었다.

김 씨는 "난 얼마 있으면 떠나니까 말 좀 하자고 했다. 그러니까 (오 씨가) 뭐 할 말 다 했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제가 준비해 갔던 흉기로 공격하고 옆방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했다.

징역 12년을 구형받은 김 씨는 탄원서를 제출해 항소에 상고까지 했으나, 원심대로 징역 12년을 확정받았다.

여러 차례 부서를 옮기면서도 참혹하게 살해된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하던 김 씨의 말소된 주민등록 회복 여부를 확인하던 운 형사의 끈질긴 추적 끝에 범인을 붙잡을 수 있었다.

공소시효를 2년 11월 남기고 검거한 윤 형사는 "살인 사건이기도 했고, 유독 이 사건의 피해자가 참혹하게 돌아가셔서 어떻게든 추적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라고 밝혔다.

sb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