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소녀 납치 살해한 '만삭 임신부'…"목숨 끊어라" 극약 건넨 친정 부모

낭비벽에 빚 늘자 범행…"내 딸이 범인" 신고[사건속 오늘]
검거 한 달 뒤 딸 출산, 남편은 양육 포기…미국으로 입양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서울=뉴스1) 김학진 기자 = 급격한 경제 성장기를 맞이했던 1990년대 대한민국 그 이면에는 과소비와 투기, 한탕주의라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일확천금을 벌기 위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사회의 약자인 '아동'은 가장 손쉬운 범죄의 표적이 됐다.

아동 유괴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승을 부리던 27년 전 오늘. 전 국민을 경악하게 한 희대의 아동 유괴 사건이 발생했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만큼 익숙한 그 이름. 범인이 임산부라는 점과 희생 아동의 길고 독특한 이름 때문에 더욱 깊이 각인됐던 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실종 사건'이다.

(KBS교양 갈무리)

◇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실종…"젊은 아줌마 따라갔다" 친구들 증언

1997년 8월30일 사건 당일 오후 2시 50분쯤. 서울 서초구 잠원동 뉴코아 스포츠센터 영어학원 앞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박초롱초롱빛나리(8) 양이 실종됐다.

시간이 지나도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박 양의 어머니 A 씨는 학원으로 달려갔고, 친구들은 박 양이 어떤 젊은 아줌마를 따라갔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A 씨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시각은 범인 전현주(28)가 하원하는 박 양을 구슬려 동작구 사당동의 자신의 지하 창고로 데리고 간 뒤였다.

유괴임을 직감한 A 씨는 바로 신고를 했고, 경찰들은 박 양의 집에 녹음기와 발신자 추적 장치를 설치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KBS교양 갈무리)

◇ 실종 신고 3시간 뒤 걸려 온 전화…아이는 이미 살해된 뒤

"나리네 집이죠, 나리는 잘 있어요"

실종 신고 3시간 뒤 첫 통화가 걸려 왔다. 하지만 전화가 연결된 시간은 너무 짧았고, 경찰이 발신지 추적까진 할 수 없었다.

박 양에게 캐낸 집 번호로 전화를 걸어 부모의 목소리를 확인한 전현주는 박 양에게 사탕이라고 속여 수면제를 먹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박 양이 울면서 집에 보내 달라고 재촉하자 전 씨는 청 테이프로 손발 등을 결박한 뒤 목 졸라 살해했다. 박 양이 유괴된 지 9시간 뒤였다.

이후 시신의 옷을 모두 벗긴 채 등산용 가방에 넣어 창고에 숨겼다.

(KBS교양 갈무리)

◇ "2천만원 준비해라"…납치 이튿날 또다시 걸려 온 '그 목소리'

"나리를 데리고 있다. 2000만 원을 카드로 준비해라"

"40분 뒤 명동역 앞 건물 앞으로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딸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음 날인 31일 2차, 3차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뭐든지 하겠다. 제발 아이를 돌려보내달라"

연예인을 꿈꾸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예쁜 딸을 찾고 싶은 A 씨는 통화 너머의 '그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간곡한 부탁을 이어갔다.

마침 추적 장치를 통해 통화 연결 위치가 포착됐다. 다급하게 명동의 한 공중전화 박스로 경찰들이 달려갔지만 이미 전 씨는 자리를 뜬 뒤였다. 경찰은 공중전화의 지문들만 채취한 뒤 수사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KBS교양 갈무리)

같은 날 밤 9시쯤 박 양의 집에 세 번째 전화벨이 울렸다.

A 씨는 경찰의 신호대로 최대한 통화 시간을 끌었고, 경찰은 명동의 한 커피숍이 발신지임을 확인한 뒤 이곳을 급습해 검문을 시작했다.

손님 13명 중 전현주가 있었다. 경찰은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신분증 확인과 검문을 실시했다.

임신 8개월 상태였던 전현주는 자신을 검문하는 경찰에게 "배 속에 아이가 있다"며 항의했고, 함께 있던 후배들은 전 씨가 당연히 범인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임신부에게 이래도 되냐"고 경찰을 윽박질렀다. 경찰은 만삭의 몸으로 유괴 사건을 벌일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현장의 모든 사람을 지문만 채취한 뒤 귀가시켰다.

(KBS교양 갈무리)

◇ 공개수사 전화되자 잠수…부모는 "내 딸이 범인이다" 신고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유괴범의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비공개 수사로 범인 검거에 실패한 경찰은 결국 사건 5일 만에 수사를 공개로 전환했고, 방송 등에 연일 보도가 쏟아지며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속히 범인을 검거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며칠 전 극적으로 검거 위기에서 벗어났던 전현주는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꼈고, 특히 박 양의 가족에게 자신이 목표로 했던 현금을 받아내는 일에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해 협박 전화를 중단하고 잠적했다.

경찰은 사라진 전현주가 강력한 용의자라고 확신하며 전 씨의 주변서 잠복수사를 시작했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전 씨의 아버지는 공개수사 이후 배포된 몽타주 등을 보게 됐고, 비슷한 시기부터 연락이 닿지 않던 딸이 의심스럽다며 경찰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경찰을 찾은 전 씨의 아버지는 녹음된 협박 전화 음성을 듣고 "내 딸의 목소리가 맞다"고 증언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괴범 전현주가 범인임이 확실시된 순간이었다.

(KBS교양 갈무리)

​◇ 사건 13일 만에 범인 검거…목 졸려 사망한 박양 발견

경찰은 박 양 유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전현주를 특정하고 수사력을 집중했다. 전 씨 부모 집 전화에도 발신지 추적기를 달았다.

9월11일 밤 11시쯤 전현주는 부모에게 안부 등을 묻는 전화를 걸었다. 발신지 위치는 불광동의 한 여관이었다.

곧바로 전 씨가 은신처를 옮긴 탓에 검거에는 실패했지만 계속해서 서울 시내의 숙박업소를 샅샅이 뒤진 경찰은 또 다른 지역에서 마침내 전 씨를 검거했다.

(KBS교양 갈무리)

사건 발생 13일 만이었다. 출산을 한 달여 앞둔 만삭의 전 씨는 오랜 도피 생활로 인해 지친 듯 탈진 직전의 초췌한 상태로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은 전 씨에게 박 양의 생존 여부부터 확인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찾아간 컴컴하고 악취 가득한 지하실 창고의 계단 아래에서 목 졸려 사망한 부패 상태의 박 양의 시신을 발견했다.

범인을 잡으면 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부모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KBS교양 갈무리)

​◇ 낭비벽으로 불어가는 채무…3천만원 빚지자, 범행 계획

전현주는 "성폭행을 당하고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라고 줄기차게 공범의 존재를 주장했다.

또 임신부가 혼자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매우 많았다. 현장검증 장소를 찾은 전 씨의 남편이 "현주야 너 아니잖아, 어쩔 수 없었잖아,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잖아"라고 아내의 범행을 믿지 못하며 울부짖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된 수사에 지친 전 씨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이 거짓 증언을 했다고 시인했고, 수사 결과 전현주의 단독 범행인 것이 밝혀졌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유복하게 자랐던 전현주는 부모의 반대로 시작된 결혼 생활에서 양가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지만, 평소 가지고 있던 사치와 낭비벽은 더욱 심해졌다. 결혼 반년 만에 약 3000만 원의 빚을 지게 된 전현주는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유괴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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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목숨 끊어라"…'속죄' 권유한 범인 전 씨의 부모

검거된 전현주는 체포 직전 부모로부터 스스로 생을 마감하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전 씨의 부모 역시 딸이 연루된 엄청난 범죄에 큰 절망에 빠지며 자포자기했음이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당시 전 씨의 부모는 "속죄하는 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뿐이다. 우리도 곧 따라가겠다"라고 임신한 딸에게 극단적 선택을 권유하며 약국에서 살충제까지 구매해 준 사실이 수사 과정 밝혀져 또 다른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KBS교양 갈무리)

전현주는 검거 한 달 뒤인 10월 10일 경찰병원에서 딸을 출산했다. 18개월간 교도소에서 아이를 키운 전현주는 이후 아이를 남편에게 보냈다. 전 씨는 아기를 친정이나 남편이 키워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기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현재 아이는 20대 중반의 성인이 됐다.

그 시기 사회적 분위기는 '아동 유괴 살인' 같은 극단적, 사회적 쇼크를 준 사건인 경우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전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후 전 씨의 상고 또한 기각됐고, 대법원에서 원심판결을 확정받은 전현주는 현재까지 청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KBS교양 갈무리)

​◇ 아동의 실명 따 불린 마지막 'OOO 유괴 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사건은 이후 드라마 '시그널'과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모티브가 됐다.

또 여성도 아이를 유괴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돼 '낯선 아저씨'를 경계하라는 교육계의 표어는 '낯선 사람'으로 성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때부터 은행이나 공공장소에 CCTV 설치되기 시작했으며 '돈' 때문에 아이를 유괴하는 사건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피해 아동의 실명을 따 불리는 수많은 'OOO 유괴 사건' 역시 1997년 박초롱초롱빛나리 양 사건이 마지막이 됐다.

(KBS교양 갈무리)

khj8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