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설명도 사과도 없었다"…북송된 국군포로 가족의 18년[THE:담]
'국군포로 유가족' 이강복 씨 실종된 아들 대신 얻게 된 종손 다시 잃어
中서 영사관에 인계하고 귀국, 공안 단속에 걸려 북송…"국가 책임 없다"
- 박동해 기자
'국군포로 유가족' 이강복 씨의 이야기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2006년 7월 28일 고향 동네 마을회관 낙성식에 참석하려 차를 몰던 이강복 씨(당시 71)는 마을이장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국방부에서 그의 둘째 형인 강산 씨의 가족을 찾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국방부에 전화를 걸어보니 뜬금없는 소리가 나왔다. 한국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형님에게 손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손자가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구해달라'는 편지를 썼다는 것이었다.
강복 씨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님에게 손자가 있고 그 손자가 탈북해 중국에 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전 후 형님의 전사확인서를 직접 받아본 기억도 있었다. 시신을 찾지는 못했지만 1953년 7월16일 금화지구 전투 중에 전사했다고 적혀 있었다. 53년 전 죽은 형님한테 손자가 있다니, 그것도 북한에….
이젠 아흔을 바라보게 된 강복 씨는 "나이가 들어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강복 씨는 이때 시작된 일이 남은 일생의 숙제가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노환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강복 씨는 보청기를 귀에 끼워놓고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국방부 직원과 통화를 하고 며칠 뒤, 충남 서산에 살고 있던 강복 씨는 서울로 아들을 보내 편지 사본을 받아봤다. '리정훈'이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은 편지에 "저는 국군포로 이강산의 장손닙니다"라고 적었다. 청년은 삐뚤빼뚤한 글씨, 맞춤법이 맞지 않는 문체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포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북·중 국경을 넘나들며 '빌어먹었다'는 그의 인생은 기구했다.
리정훈의 편지에 따르면 전쟁 중 사망한 줄로만 알았던 강복 씨의 형님은 사실 북한의 포로가 됐다. 정훈은 편지에서 자신의 할아버지인 국군포로 이강산 씨가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탄광에 배치돼 40여 년간 탄광 노동자로 일을 하다 1996년 8월 14일 사망했다고 썼다.
그리고 편지에는 강복 씨의 가슴을 찌르는 문구들이 있었다. "저는 북조선으로 갈 수도 없고(이번 잡히면 7~15년 감옥 생활 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살수도 없고 해서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하루하루 공포 속에서 보냅니다. 저의 살길은 할아버지의 고향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강복 씨는 정훈이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세운 강복 씨는 정부 담당자와 논의해 정훈이를 구해오기로 했다. 국방부 담당자는 구출 작업을 도와줄 남북이산가족협의회(이하 협의회) 사람을 소개해 줬다. 정훈이와 그의 여동생 리정화 그리고 두남매의 엄마(강복 씨의 조카며느리) 3명을 구해오면 3600만원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편지를 받고 채 한달이 되지 않은 2006년 8월 17일 강복 씨는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다. 청도행 비행기를 탄 뒤 다시 톈진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톈진에 내려 정훈이를 처음으로 만났다. 정훈은 "할아버지를 만났으니 이제 살았습니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정훈이와 톈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차를 빌려 선양으로 향했다. 선양에서 나머지 가족들을 만나기로 했다.
혹시나 중국 공안의 검문에 걸릴까 봐 강복 씨는 일부러 비싼 외제차를 빌렸다. 공안들도 외제차는 잘 건드리지 않는다는 풍문 때문이었다. 외제차 덕분이었는지 8시간 차를 몰아가는 길에 별다른 검문은 없었다.
선양에 도착해 만난 조카며느리는 강복 씨를 보자 '아이고 아버님'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사망한 형님과 강복 씨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틀 동안 서로가 가족임을 확인하는 질문들이 오갔다. 강복 씨는 대화를 할수록 가족이 맞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훈과 가족들은 '이제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강복 씨의 손을 잡고 방방 뛰며 기뻐했다. 그 표정들이 선명하게 강복 씨의 뇌리에 박혔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가족. 친형도 아닌 친형의 손자를 구하기 위해 강복 씨는 큰돈을 쓰기로 하고 발품을 팔았다. 직접 중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정훈의 가족이 국내로 들어오면 일을 할 일자리도 지인을 통해 알아봤다. 그가 이렇게 정훈의 귀환에 힘쓴 것은 마음 한쪽에 묻어둔 그리움 때문이었다.
강복 씨의 막내아들은 1994년 친구와 함께 인도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현지인들이 주는 음료를 먹고 쓰러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몸으로 맞섰다'는 목격담을 남기고 사라진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형제들이 한 달 가까이 인도에 머물며 수색을 하고 현지 경찰에게 뇌물까지 찔러주며 신경써줄 것을 부탁했지만 실종 지역을 샅샅이 뒤져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막내여서 그런지 더 관심과 기대가 컸던 아들이었다. 또 막내는 그 기대에 부응할 만큼 착하고 성실했다. 군을 제대하고 과외를 해서 100만 원을 벌어오더니 '배낭여행을 가려고 하니 돈을 좀 보태주시라'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귀여워 여행에 쓰라고 130만 원을 보태줬다.
그렇게 강복 씨는 시신도 찾지 못한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강복 씨는 아내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됐다. 정훈이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강복 씨는 "하느님이 아들을 데려간 대신 새로운 자식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했다. 정훈을 볼 때 막내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복 씨는 "형님의 손자지만, 우리 손자가 내 속을 좀 풀어주려나 그랬지. 애가 씩씩하고 배운 건 없어도 똘똘하더라"라고 정훈을 기억했다.
새로운 자식을 얻은 마음에 강복 씨는 곧바로 정훈이네를 데리고 한국으로 오고 싶었지만 탈출 작업을 주선해 준 협의회 측에서 '일정 수의 탈북민을 모아서 한 번에 모셔 와야 한다'고 설명해 일단 그쪽에서 소개해 준 숙소에 정훈이네를 맡기기로 했다. 한 달 정도면 한국으로 올 수 있다고 하기에 방값도 선불로 결제하고 일단 귀국해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송환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속이 타는 가운데 '귀국이 늦어지고 있어 숙소비를 더 내야 한다'는 소식만 전해졌다. 또다시 돈을 부쳤다. 그렇게 10월 11일이 돼서야 정훈이 가족이 영사관에 인계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국방부에서도 '무사히 영사관에 입문했으니 이제 염려치 않아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정훈과 가족을 인계받은 영사관 직원은 영사관 근처 민박집에 이들을 거주시켰다. 평소에 탈북민들을 송환하기 전에 임시숙소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투숙 당일 다른 탈북자들이 선양 소재 미국대사관으로 진입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중국 공안 당국의 대대적인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이때 정훈네를 포함해 국군포로 가족들이 함께 머물고 있던 민박집에도 공안들이 들이닥쳤다.
강복 씨가 단속 소식을 들은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1주일이 지난 10월 18일이었다. 당시 강복 씨를 찾아온 정부 관계자들은 정훈이를 포함한 국군포로 가족 9명이 11일 단속에 적발돼 국경지역인 단둥을 거쳐 12일 신의주로 곧바로 북송됐다고 했다. 이들은 북송 사실을 전하며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아이들의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언론 등에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입단속을 했다.
정부의 입단속에도 결국 사실은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월 국군포로 가족들이 한번에 북송됐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정부의 실책에 대한 언론의 지적이 줄을 잇고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유감'의 뜻만 공표했다. 이후 야당이 현장조사단을 꾸리고 국정조사도 요구했지만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논란은 뜨거웠지만 정작 당사자인 유가족들은 소외됐다.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도 강복 씨의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북송된 가족의 생사는 알 수 없고 이렇다 할 설명도 없었다. 혹시나 정훈이 가족에게 해가 될까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살다 2013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송환을 위해 썼던 자금의 일부라도 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2015년 1심은 강복 씨의 손을 들어줬으나 2심에서는 패소했다. 정부가 구출을 위해 노력을 했고, 결정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시효가 지났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강복 씨는 판결을 납득 할 수 없었다. 정훈네 가족은 국가를 위해 총을 들고 싸우다 포로가 된 형님의 자손이었다. 그런데도 국가가 아닌 자신이 돈을 들여 송환 계획을 세우고 영사관에까지 인계했는데 일이 잘못되니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게 화가 났다. 그는 재판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북송 과정의 진상에 대한 설명이나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강복 씨는 정훈씨의 가족이 북송된 이후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이름을 가문 족보에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 정훈의 옆에는 '2006년 병술(丙戌) 10월11일 주중한국영사관의 부주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중한국영사관의 부주의'를 족보에 써넣은 흔적에 강복 씨의 사무친 한(恨)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 작은 기록은 그의 마지막 희망이다. 그는 "내가 찾아보지 못해도 기록을 해놓으면 혹시나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누군가는 (가족을) 찾겠지"라고 말했다.
노환으로 인해 "요즘 안 아픈 곳이 없다"는 강복 씨는 남은 인생에 두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정훈의 북송 사건과 관련해 사과와 배상을 받는 것, 그리고 그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벌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는 배상책임이 없다고 했고 강복 씨는 공식적인 사과의 말을 듣지 못했다. 외교부와 국방부는 당시 사건에 대한 징계 여부 등을 확인하고 싶다는 요구에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이야기를 마친 강복 씨의 집 거실에는 어른 팔뚝 정도 크기의 성모상이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모상 밑에 강복 씨의 아내가 놓아둔 묵주 목걸이가 반짝이며 빛을 냈다. 다만 강복 씨는 북송 사건 이후로 더 이상 성당을 다니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나이 들고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고 무슨 소용이냐"며 말을 흐렸다.
*국군포로 이강산은?
1928년 충남 서산군 소원면 송현리(현재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에서 태어난 고(故) 이강산 선생은 스물둘 나이에 한국전쟁을 맞았다. 고향 땅에 밀고 내려온 인민군에 강제로 이끌려 의용군에 편입됐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등 연합군의 반격으로 풀려나 1951년 10월2일 다시 국군에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은 뒤 수도사단에 배치됐으나 정전협정 11일 전인 1953년 7월16일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실종됐다. 국군포로로 납북된 뒤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탄광에 배치돼 40여년간 탄광노동자로 일을 하다 1996년 8월14일 사망했다. 위패는 태안보훈공원에 모셔져 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무성화랑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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