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병은 죽어서도 억울…타살→자살→규명 불가, 3심까지 다른 판결

총 맞은 부위는 3곳, 총성도 2번 탄피도 2개뿐 [사건 속 오늘]
"구타 뒤 총격" 진술도 번복…대법 "부실 조사, 유족에 3억 줘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홈페이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

(서울=뉴스1) 김송이 기자 = 1948년 창군 이후 2020년 5월 3일까지 전사나 순직으로 분류되지 않은 원인불명 사망자는 3만 8000여 명에 이른다. 조국의 부름에 아들을 보낸 죄밖에 없는 유족들은 죽음의 원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응어리진 가슴을 안고 살아간다.

허원근 일병 사건은 군대 내 의문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40년 전 오늘 1984년 4월 2일, 당시 23세였던 허 일병은 육군 7사단 GOP 부대의 폐유류고에서 세 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 양쪽 가슴에 두 발, 머리에 한 발…의문투성이인데 자살?

군 수사기관은 일찍이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지만 유족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M16 소총으로 스스로 총을 쐈다는 부위는 무려 세 군데로, 양쪽 가슴과 오른쪽 눈썹 윗부분의 머리였다.

한 차례 자기 가슴에 총을 쏜 뒤 자세를 고쳐잡아 다시 반대편 가슴에 총을 쏘고, 총의 반동을 이겨내며 다시 총을 들어 머리를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유족은 사인이 석연치 않다고 주장했으나 사건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제대로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이후 2000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지고 조사 활동에 나서고서야 허 일병 사건은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

◇ 의문사위 "타살" vs 국방부 "자살"…국가기관 간 공방전

사건을 조사한 의문사위는 2002년 9월 같은 부대 선임하사를 용의자로 지목하면서 허 일병이 타살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국방부가 제동을 걸었다. 국방부 특별진상조사단은 의문사위가 현장 검증을 조작했으며 대대본부 및 인접 소초원들의 진술은 거짓이거나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의문사위는 특조단 소속 조사관인 인 모 상사가 사건 자료 일부를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문사위가 인 상사로부터 어렵게 넘겨받은 비밀 파일 안에는 특조단 안에서도 타살을 의심하고 조사해 온 내부 조사 자료가 있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

◇ 현장 사진과 다른 수사 기록…은폐 정황 곳곳에

당시 군 헌병대의 수사 기록에는 현장 1m 반경 내에 허 일병의 골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허 일병의 사망 현장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장이 훼손됐거나 사체가 옮겨졌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의심이 더 짙어진 건 헌병대 최초 수사 기록에 있는 그림 때문이었다. 총상은 세 군데였는데 사체 발견 당시 현장을 그린 두 장의 스케치에는 탄피가 두 개뿐이었다. 당시 중대원들도 대부분 총성이 두 번 들렸다고 기억했다.

또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 씨는 아들 사망 다음 날, 부대에서 심상치 않은 핏자국을 봤다고 했다. 허 씨는 아들이 근무하던 중대 본부 근처에서 큰 핏덩어리를 발견했고, 이를 헌병 대장이 삽으로 떠서 봉투에 담았지만 수사 기록에는 그와 관련된 자료가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부검을 위해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흐른 피일 것이라며 문제 될 게 없다고 설명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

◇ "총 맞는 거 봤다" 목격자 등장했으나…나머지 중대원들은 반박

의문사위는 허 일병이 총에 맞는 걸 봤다는 직접 목격자의 진술도 확보했다.

목격자 전 모 씨는 허 일병 시신 발견 전날 중대장실에서 새벽까지 술판이 벌어졌고, 중대장으로부터 욕을 먹은 한 선임하사가 중대장 당번병이었던 허 일병을 구타한 뒤 그에게 총을 쐈다고 했다. 이 일은 날이 밝기 전 윗선까지 은밀히 보고됐고, 중대장 지휘 아래 대원들은 역할을 나눠 시신을 옮기고 물청소로 피를 닦는 등 뒷수습했다는 게 18년 만에 입을 연 전 씨의 진술이었다.

하지만 전 씨 외 대부분의 내무반 중대원은 전 씨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소설이라고 말했다. 유일하게 전 씨의 말이 사실이라고 진술했던 단 한 명의 중대원도 얼마 안 가 진술을 번복했다.

공문에 적힌 총기 번호를 누군가 고쳐 쓴 흔적이 발견됐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

◇ 자료 조작 흔적까지…민낯 드러낸 군 사망자 처리 과정

의문스러운 점은 더 있었다. 허 일병의 손에도, 총에도 피 묻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허 일병의 왼손에는 찢기고 그을린 상처가 남아있었는데, 이에 대해 미국 총기 감식 전문가는 총알을 막거나 총구를 돌리려고 할 때 생기는 '방어흔'이라고 봤지만 국방부 특조단은 머리에 총을 겨눌 때 총을 안정적으로 고정시키기 위해 손을 받친 '지지흔'이라고 주장했다.

의문사위 조사관은 특조단 조사관인 상사의 파일에서 현장에서 발견된 총기가 사망한 허 일병의 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포착했다. 최초 헌병대 수사 과정에서 총기에 대한 감정을 의뢰하는 공문에 적힌 총기 번호를 누군가 고쳐 쓴 흔적을 포착한 것이었다.

대법원이 故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린 2015년 9월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허 일병의 부친 허영춘 씨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5.9.10/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 대법원도 풀지 못한 채 끝내 미궁에…국방부, 33년 만에 순직 인정

이렇게 의문사위와 국방부 특조단 두 국가기관의 정면충돌 이후 서울중앙지법은 2010년 2월 1심에서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2013년 8월 서울고등법원 2심에서는 자살로 뒤집혔다가, 2015년 9월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다시 '허 일병의 사인은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만 대법원은 군 수사기관의 부실한 조사에 일부 책임을 물어 국가가 유족에 3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허 일병의 유족은 재심을 청구했고, 2016년 12월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후 2017년 2월 국민권익위원회가 허 일병에 대해 순직 인정을 권고하자,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이고 같은 해 5월 허 일병에 대해 순직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syk1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