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고 박원순 사건에 여전히 떠도는 '피해호소인' 악령

ⓒ News1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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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피해호소인'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사건에서 처음 언론에 등장했던 단어다. 사건 초반 더불어민주당 내 인사들이 피해자 A씨를 '피해자'라고 지칭하는 대신 사용하기 시작하며 유명해졌다.

이 단어는 피해자를 '피해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당시에도 2차 가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몇몇 민주당 의원들은 '피해호소인' 표현을 쓴 것에 대해 A씨에게 공개 사과했다.

하지만 아직도 A씨를 '피해자'로 부르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A씨의 실명을 페이스북에 노출해 성폭력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된 김민웅 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항소심에서 A씨를 성폭력처벌법상 '피해자'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김 전 교수는 지난해 4월에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4년간의 지속적인 추행 주장과 그 피해를 주장하는 이의 박 시장에 대한 애정표현, '대권가도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편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며 A씨 피해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A씨의 피해 사실이 이미 국가인권위와 법원에서 인정됐다며 김 전 교수에게 원심보다 무거운 형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사실상 2차 가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 전 시장이 2020년 7월 사망하면서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했지만 이듬해 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직권조사를 통해 박 전 시장의 성폭력 사실을 인정했다. 박 전 시장이 A씨에게 보낸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비롯해 집무실에서 이뤄진 신체 접촉 등은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권위 조사 결과가 나온 뒤에도 A씨의 피해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과 소송 제기는 계속 나왔다. 박 전 시장의 아내 강난희씨는 인권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1심에서 패소하자 항소했다. 정철승 변호사는 SNS에 A씨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가 기소됐다. 박 전 시장의 성폭력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일명 '박원순 다큐'는 작년 9월 상영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2차 가해가 지속되는 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라는 요구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다. 상처를 회복하기는커녕 일상이 큰 위협을 받는다. 실제로 A씨는 실명이 공개되는 피해를 겪자 개명까지 했다. A씨를 향한 박 전 시장 지지자들의 무차별적인 욕설과 비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2차 가해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했던 김지은씨에게도, 박진성 시인으로부터 성희롱 피해를 당했던 김현진씨에게도 일어났던 현실이다. 두 사람 모두 재판을 통해 피해 사실을 인정받았음에도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가해자를 두둔하는 주장이 떠돈다. 이런 사회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그것도 가해자가 유명한 사람이라면 고발할 용기를 내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 자명하다.

'미투 운동' 이후로 사법부가 2차 가해를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지만 불법 촬영 피해자의 신원을 노출한 축구선수 황의조 사건과 같이 2차 가해는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호소인'이라는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사회가 2차 가해에 대한 경각심을 더 키워야 한다.

hypar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