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정선엽 병장 兄 "동생 면회 신청 불허 뒤 軍 '영안실로…' 연락"

12·12군사쿠데타 당시 국방부 헌병으로 반란군에 맞서다 전사한 고(故) 정선엽 병장과 서울국립현충원에 있는 고인의 묘. ⓒ 뉴스1 DB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12·12군사 쿠데타 당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사수하라'는 명령에 충실하다가 신군부 측이 쏜 4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한 고(故) 정선엽 병장(사망 당시 23세)의 44번째 기일이 지난 13일 지나갔다.

고인은 1000만 관객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속에선 조인범 병장으로 나왔다.

조선대 전기공학과 2학년 때 입대한 고 정선엽 병장은 제대 후 복학해 대학을 마친 뒤 동생 뒷바라지를 하던 형의 권유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디.

고인의 형인 정운채 목사는 15일, YTN과 인터뷰에서 동생이 전사한 1979년 12월 13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5남매 중 3째이자 장남인 정 목사는 "저는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상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며 "정확하게 사건이 일어나기 1주일 전 저한테 전화를 걸어 온 동생에게 제가 '남은 3개월 군 복무 마치고 조선대학교 졸업하면 내가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했더니 동생이 '형님 고맙다'고 하더라"고 했다.

정 목사는 "그 약속 대화가 동생과 마지막 대화였다"며 애통해했다.

동생 사망소식을 듣게 된 경위에 대해 정 목사는 "당시 서울역 앞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며 "출근길에 삼각지를 지나갈 때 택시 기사님이 '간밤에 육군본부 국방부 부근에 총격전이 심하게 일어났다'고 해 동생이 국방부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가서 면회 신청을 했었다"고 했다.

이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면회가 안 된다'고 해 사무실로 돌아와 근무하고 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국방부에서 '국군통합병원 영안실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동생이 어떻게 전사했는지에 대해선 "당시 경위를 전혀 설명 듣지 못했다"며 "사건이 나자마자 제가 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같은 교회 교우인 국방부 군무원을 통해 '다들 투항했는데 정 병장은 끝까지 무기를 빼앗기지 않고 무장 해제를 요청하는 반란군을 발로 걷어차 쓰러뜨리자 저쪽에서 총격을 가해서 사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희 가족에겐 전두환이 원수다"며 "어머니는 사건 이후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고, 일찍 치매가 와 힘들게 사시다가 떠나셨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현재 사역을 위해 미얀마에 머물고 있는 정 목사는 "조선대가 동생에게 명예 졸업장 수여, 조선대학교 내 서울의 봄 촬영지에 정선엽 병장 조형물도 세워주겠다며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모교인 조선대학교가 정선엽 병장 전사를 명예로운 사건으로 인정한다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정 목사는 "정말 저희 가족들에게는 많은 위로가 된다. 조선대학교에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buckba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