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갈린 '서울의 봄' 사망자 3명→김오랑 정선엽은 전사, 박윤관은 순직
군사반란 규정 뒤 진압군 사망자는 전사, 반란군 병사는 순직
복종외 다른 선택 없었던 박윤관 육군 일병…전사자로 예우해야
- 박태훈 선임기자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1979년 12월 12일 밤부터 12월 13일 새벽까지 9시간 동안 벌어졌던 12·12쿠데타를 다룬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이 그때를 알지 못했던 젊은 층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MZ세대들은 황정민(전두광분), 정우성(이태신분) 등의 열연에 감탄하면서 군사반란, 12·12란 무엇인가, 12·12의 씨앗을 잉태한 10·26과 박정희, 하나회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12·12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3명의 군인들도 반란군 소속이었나, 진압군 소속이었나에 따라 죽어서도 다른 대접을 받아 '이제는 똑같은 예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12·12쿠데타는 군과 경찰, 중앙정보부 등 정보 수사라인을 한손에 움켜쥐고 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해 모든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한 군사반란이다.
이들 신군부, 정치군인들을 막아서려던 이들이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휘하의 참모들이었다.
말이 진압군이지 육본 참모진과 장태완 수경 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수경사 33단 일부, 육본헌병대, 9공수여단(이마저 도중에 회군) 정도로 병력과 화력 면에서 반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날 9시간의 반란과정에서 3명이 숨졌다.
사망자는 특전사령관을 보호하다 반란군 총에 희생된 고 김오랑 소령(이후 중령 추서), 국방부 헌병중대 정선엽 병장, 수경사 33헌병대 소속 박윤관 일병 3명이다.
그중 진압군 소속이었던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은 각각 2022년 11월 29일과 12월 7일 국방부 중앙전공상심의위원회에 의해 '전사자'로 분류됐다.
반면 박윤관 일병은 여전히 '순직자'에 그치고 있다.
다만 전두환 정권시절 신군부는 박 일병을 '상병'으로 1계급 추서했을 뿐이다. 같은 잣대라면 정선엽 병장도 '하사'로 추서함이 마땅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를 외면했다.
전사자와 순직자의 경우 유족연금에선 차이가 없으나 보상금 차원의 일시금에선 큰 차이가 있다.
또 국립현충원 고인의 묘비에도 '전사', 즉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는 명예로운 글귀가 새겨진다.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이 전사 처리된 건 불의에 맞섰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1997년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 이를 막으려던 진압군의 행동이 올바른 것임을 못박았다.
박윤관 일병이 '전사자'로 되지 못한 것도 반란군 소속이라는 딱지 때문이지만 이제는 박윤관 일병도 '전사자'로 예우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12·12쿠데타 당시 수경사 33단 일병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속에서 명령을 따르다 전사한 병사들의 명예를 지켜드려야 한다"며 고 정선엽 병장과 박윤관 일병 흉상건립을 주문했다.
아울러 박윤관 일병에게도 '전사자'라는 명예가 주어지길 희망했다.
육군 일병이라는 신분은 상관의 명령에 오로지 복종할 뿐 흑과 백을 따질 처지가 못 된다.
당시 박윤관 일병도 '육군참모총장 초소를 사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초소를 지키다가 역시 '반란군에 넘어간 육군참모 공관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고 진입한 해병대 병력의 총탄에 쓰러졌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어두운 밤 초소를 지킨 박윤관 일병에게 '반란군 소속'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44년간이나 씌운다는 건 너무나도 가혹하다.
이제는 우리가 박 일병 등에서 멍에를 벗겨 줄 때가 됐다.
buckba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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