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캐릭터 노출이 적은 건 일러스트 '사상' 탓이라고?[체크리스트]
그들은 왜 여성 일러스트 작가 계정 털기 나섰나
게임업계 고질병 '사상검증'…유인촌 "개선해야"
- 이기범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후보자는 게임 업계 페미니즘 사상 검증이 없어야 한다고 사전 질의에 답변했는데, 구체적인 대책인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이용자들과의 문제 아니겠나. 과도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
지난 5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오간 질의응답입니다. 당시 후보자였던 유인촌 장관은 "교육과 모니터링을 통해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 분리, 증언 시스템 등이 잘 작동되도록 하겠다"며 해당 문제를 인정하며,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장관으로서 적합한지 따져 묻는 자리에서 왜 게임 업계의 사상 검증 얘기가 나왔을까요.
게임 업계에서 지난 수년간 페미니즘 사상 검증 논란이 반복돼 온 탓입니다. 일부 게임 이용자들이 게임 회사 직원의 SNS 계정을 들여다보고,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로 판별한 직원에 대해 퇴출을 요구하면 회사가 이에 응답하는 식입니다.
◇게임 불만이 사상검증으로
시점을 가장 최근으로 돌려보면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의 '수영복 논란'이 있습니다. 노출이 적은 여성 캐릭터 복장에 불만을 가진 이용자들이 일러스트 작가의 페미니즘 행적을 찾아내 퇴출 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일입니다.
사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용자들은 처음엔 게임의 밸런스 문제(게임 요소 간 균형)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게임 일러스트를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캐릭터의 노출이 적은 데는 페미니즘 사상이 담겼다는 주장이 이어졌고, 결국 이들은 한 여성 일러스트 작가의 트위터(현 X) 계정 신상 털기에 나섰습니다.
이른바 '페미 일러스트 작가'가 게임사에 대한 손쉬운 공격 거리로 여겨진 셈입니다. 이들이 문제 삼은 건 해당 작가가 낙태죄 폐지 옹호나 불법 촬영 반대 집회, 여성 혐오 정서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리트윗하거나 공감한다는 표시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직접 회사를 방문해 "우리가 여기에 지금 쓴 돈도 많은데 마지막 기회를 살리는 게 낫지 않냐"며 "여캐(여성 캐릭터) 노출도 문제 혹은 일러스트레이터 문제와 관련해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며 회사에 자신들의 의견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이 게임사는 지난 7월26일 "논란이 된 직원분과 계약은 종료될 예정"이라고 입장을 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사상 검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지난 8월3일 재차 입장문을 내고 "논란이 된 작업자분에게 사상적인 이유를 문제 삼지 않았고, 더불어 해고 통보를 내리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요구 관철시킨 성공의 경험
이처럼 일부 게임 이용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는 수단으로 '사상 검증'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한 성공의 경험이 축적된 탓입니다.
게임 업계 페미니즘 사상검증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2016년 넥슨에서 자사 게임 '클로저스' 김자연 성우가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하차한 것도 논란이 됐습니다.
이후 논란은 '소녀전선', '마녀의 샘3' 등 페미니즘 성향 게임 원화가들에 대한 퇴출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2018년 IMC게임즈는 '트리 오브 세이비어' 일러스트 작가에 대한 퇴출 요구에 부응하는 사상 검증에 가까운 해명문을 올려 논란에 불을 지폈습니다.
당시 일부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트리 오브 세이비어' 일러스트 작가에 대한 퇴출 요구가 확산됐습니다.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등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하고 드라마 '나의 아저씨' 비판, 낙태죄 폐지 주장, 생리대 가격에 대한 문제제기 글을 '리트윗'하거나 '마음에 들어요'를 눌렀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IMC게임즈 측은 이용자들의 불만을 그대로 수용해 일러스트 작가와의 면담 과정에서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같은 계정은 왜 팔로우했나", "한남이란 단어가 들어간 트윗을 리트윗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물었습니다.
지난 2020년 국내 출시된 중국 모바일 게임 '명일방주'도 한 국내 일러스트 작가의 과거 SNS 계정 발언을 문제 삼아 일러스트 작업물을 삭제해 사상검증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창작 노동자 21명 중 15명 '사상 검증' 경험
실제 게임 일러스트 작가 등 콘텐츠 창작 노동자들은 사상검증에 시달리며 자기 검열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발표된 범유경·강은희·이도경 변호사의 '디지털 플랫폼 콘텐츠 창작 노동자의 노동 조건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심층 면접에 참여한 창작 노동자 21명 중 15명이 사상 검증을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이들은 SNS 사용을 중단하거나 창작 과정에서 특정 표현을 포기하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창작 노동자는 계약 관계를 맺는 회사의 우월적 지위에 의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탓에 쉽게 이 같은 사상 검증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가위원회는 지난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에 게임 업계 내 여성 혐오 및 차별에 대해 실태 조사를 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체부는 제대로 된 실태 조사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문체부 장관 청문회에 게임 업계 사상 검증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온 이유입니다.
K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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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거나 쟁점이 되는 예민한 현안을 점검하는 고정물입니다. 확인·점검 사항 목록인 '체크리스트'를 만들 듯, 우리 사회의 과제들을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