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수능 서른 즈음에 출제 원칙을 재확인
(서울=뉴스1) 정문성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수능 출제위원장(경인교대 교수) = 매년 11월 셋째주 목요일은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숨을 죽이는 날이다. 대부분 직장이 수험생을 위해 출근 시간을 늦춘다. 영어 듣기평가가 실시되는 특정 시간에는 항공기의 이착륙도 금지한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나드는,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학벌이 좋은 국민을 보유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왜냐하면 이날 한번의 시험으로 귀한 한명 한명의 인생 진로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수험생도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해 스스로 길을 만드는 설레는 기회이기도 하다.
원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스스로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시험제도로 1993년에 출발했다. 그러나 국가에서 주관하는 이 시험의 공신력이 높다 보니 대부분 대학이 이 점수를 입시에 활용했다. 그러면서부터 처음에 설정한 수능의 목적이 변했다. 교육을 통한 자녀의 성취를 원하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이 치열한 입시경쟁으로 나타나면서 변별력을 갖춘 대입전형 자료가 돼야 했던 것이다.
교육 당국은 지나친 입시 지옥을 완화하면서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교육 기회의 균등' 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수험생의 사교육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공정한 입시를 위해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하고 수능 시험의 소위 '선발 배치'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입시 정책이 바뀌었다.
대학입시에서 수능의 역할이 커질수록 수능 출제의 3가지 원칙은 중요해졌다. 고등학교 교육과정 범위에서 출제하고, 적정한 난이도로 변별력을 확보해 수험생들이 자신의 실력에 맞게 대학에 진학하고, 오류 없는 문항을 출제해 입시 혼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3가지 원칙을 지키면서 출제진이 느끼는 압박감은 실로 대단하다. 1달이 넘는 기간 동안 차단된 장소에서 출제와 검토를 반복한다. 출제진은 24시간 수능 문제만 생각하면서 생활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 볼테르가 말한 "의심받는 것은 불쾌하지만 의심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명언에 따라 끊임없이 문제를 의심하고 수정·보완한다. 수험생의 인생이 걸린 문제 하나하나를 소홀할 수 없는 교육자의 마음 때문이다.
가장 힘든 건 대입전형 자료 제공이라는 수능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데이터와 경험을 바탕으로 변별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험생의 수준 또한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으로 다를 수가 있어서 고려할 변수가 만만치 않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여파가 수험생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가 고민이었고 졸업생이 대거 늘어난 것도 큰 변수가 되기도 했다. 해마다 고려해야 할 변수가 늘어나더라도 수능은 늘 변별력을 갖춘 대입전형 자료를 산출해야 한다.
수능 문항은 언제부터인가 교육과정 범위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서 있게 됐다. 사실 교육과정 범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가 있다. 원래 교육과정은 학생이 성취해야 할 최소한을 정한 것이고, 그 이상의 성취는 학생 개인의 능력에 따라 열려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이 사이에서 소위 '킬러문항'이 탄생했다.
이번 수능은 '킬러문항'을 제거하고 출제진들이 출제의 기본 원칙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출제과정에서부터 출제진은 '킬러문항' 사례를 참고하며 교육과정의 범위에서 충실하게 출제하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육과정에 기초해 학교현장에서 수업을 진행해 오던 교사 중심의 검토진이 문항을 수차례 검토하고 따져보며 의견을 전달했다. 교육부도 제도적으로 수능 출제점검단이라는 절차를 하나 더 도입해 철저히 대비했다.
출제진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입시경쟁이 있는 한 사교육을 막을 수는 없으나 일부 상위권을 위한 기형적 사교육을 유발하는 소위 '킬러문항' 논란이 더 이상 지속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대급'으로 이의신청도 적었고 '킬러문항' 없이도 매우 질 높은 문항이 출제됐다는 평가도 있었다. 상위권의 변별도 확보됐고 교육과정의 범위를 벗어나는 문항은 출제되지 않았다.
'킬러문항' 없이 출제의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는 수능 출제가 이후에도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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