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타고 식당도 편의점도 못 가"…장애인 불편 국가 책임은?

장애인 단체 등 "국가 부작위 책임"…정부 "손해와 인과관계 없어"
전원합의체, 정부 개선 노력 집중 질의…토론 거쳐 4개월 내 결론

조희대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차별구제 청구 등 소송 상고심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20년 가까이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기준을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는지 판단하기 위한 공개 변론을 연다. 2024.10.23/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황두현 정재민 기자 = 편의점 등 소규모 소매점에 지체장애인을 위한 접근시설 설치 의무를 부과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 유무를 두고 대법원에서 공방이 벌어졌다.

장애인 측은 "장애인 접근권 제한을 방치한 건 국가 책임"이라고 주장했고 정부는 "법 개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반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정에서 A 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 구제 청구 소송 등 상고심 사건의 공개 변론을 열었다. 전원합의체 공개 변론은 2021년 이후 3년 만으로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처음이다.

소송 쟁점은 '국가가 소매점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일정 면적으로 규정한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는 것을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로 볼 수 있는지', '위법했더라도 고의·과실 없는 경우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등이다.

1998년 제정된 구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편의시설 설치 의무 소매점 범위를 '바닥면적 300㎡ 이상'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 97%가 의무에서 면제됐다.

규정은 2022년 4월 27일 '바닥면적 합계 50㎡ 이상 1000㎡ 미만 시설'로 개정됐으나 장애인 단체 등은 "정부가 20여 년간 장애인의 접근권을 방관했다"며 소송을 냈다.

법 개정 24년 걸려…국가 부작위 의무·고의과실 배상 쟁점

원고대리인 이주언 변호사는 "관련 법률은 장애인 등이 일상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시설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권과 국가 의무를 정했다"면서 "그런데 전국에 이에 해당하는 소매점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시행령이 개정되는데 통상 5~7개월이 소요 되는데 이 사건은 24년이 걸렸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1998년 이후 2008년 장애인 차별법 시행, 2014년 UN 장애인인권권리위원회 권고,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개정 권고가 있었음에도 개정이 지연된 사실을 지적했다.

참고인으로 출석한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1998년 장애인 편의법이 시행되면서 휠체어 사용자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면서도 "그러나 면적 기준을 제한하면서 음식점, 카페, 약국, 식품점 등 대부분 소매점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시설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을 사러 편의점에도, 머리를 깎으러 이용원에도, 여권 사진 찾으러 사진관에도 못 간다"며 "출장으로 간 뉴욕이나 도쿄에서는 소매점 출입을 걱정한 적이 없는데 휠체어 사용자들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식당을 찾아 헤매지 않도록 책임을 물어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반면 피고 측인 정부법무공단 이산해 변호사는 "소매점 접근권 개선은 소상공인이나 영세업자가 직접 관련돼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며 "온라인 구매, 대형마트 이용, 보조사 활용 등 대체 구매 수단이 많다"고 말했다.

아울러 "보건복지부는 5조 원의 관련 예산 중 50%를 장애인 활동 보조에 사용하며 대상자와 시간을 확대하고 있다"며 "정부는 부족하나마 접근권을 포함한 지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부작위 주장을 반박했다.

안성준 한국장애인개발원 팀장은 "정부는 5년마다 편의시설 실태 조사를 실시해 설치율을 98%대까지 끌어올렸다"며 "누군가에게는 느리다고 할 수 있지만 정부는 제도와 정책을 방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회원들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대법원 공개변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20년 가까이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기준을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는지 판단하기 위한 공개 변론을 연다. 장애인단체는 이와 관련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장애인이 식당이나 편의점 등 기본적인 생활편의시설조차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2024.10.23/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대법관들 "개선 노력 말해달라"…정부 "입법 준비했으나 코로나로 지연"

대법관들은 장애인 편의시설 접근권 개선을 위한 그간 정부의 노력과 소송 결과에 따른 실제 개선 가능성을 질의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 참여를 위해 교통수단 이동권과 시설 접근권이 필요하다"며 "이동권은 굉장히 잘 되어 있는데 접근권은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권영준 대법관은 2022년 이전 UN 권고 등에도 개정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피고 측 안 팀장은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정부는 공공 영역이나 규모가 큰 시설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소매점이나 소규모 시설도 강화하는 방안으로 추진하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

이춘희 보건복지부 과장은 "장애인 관련 다양한 입법과 정책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과정에서 문제를 받아들이는 수준이 축적된 것"이라며 "2018년부터 입법을 준비했으나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법 제정에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다만 신숙희 대법관은 정부 노력이 2018년 이후 집중된 점을 지적하며 "최근 기간을 말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달라"고 요청했다.

원고 측 임성택 변호사는 "다수 편의점은 구법에 따라 여전히 상당한 접근권 제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오 대법관 물음에 "해외는 과거 건물도 소급해서 적용하기도 하고 유예를 둬서 설치하기도 한다"며 법상 미비점을 짚었다.

배 이사는 해외 사례를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일본 일부 지역은 조례에 의해 턱을 없애거나 경사로를 설치한 곳도 있다"며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들을 위한 차원에서도 소상공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고 말했다.

장애인에 실제 발생한 손해 있었나…인과관계 집중 질의

정부의 규정 개정 지연에 따른 원고들의 손해 사이 인과관계도 쟁점이 됐다. 이와 관련 법학 교수들도 참고인으로 나와 의견을 냈다.

원고 측은 "여러 차례 개정 권고에도 편의점 경사로 설치 의무를 면제해 접근권이 상당한 정도로 침해됐다"며 "(정부의) 불법 확인을 위한 상징적 금액 배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중권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행령에 의해 접근권이 유명무실하게 된 이상 불이익이 구체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피고 측은 "정신적 손해는 규정이 개정되면서 회복됐다고 볼 여지가 있고, 특별한 손해배상 사정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안병하 강원대 법전원 교수도 "무엇 때문에 어떤 손해가 발생했는지 증명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이날 논의 내용과 각계각층에서 제출된 의견을 토대로 최종 토론을 거쳐 결론을 내릴 방침이다. 판결은 늦어도 4개월 이내에 나올 전망이다.

ausur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