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 20년…늘어난 정년·줄어든 임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세상을 바꿀 법정]⑥ 대법원 판결 그 후…엇갈린 하급심 판결
"임금 불이익 크면 무효" vs "고용 안정·일자리 창출 수단"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인 동시에 나침반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법정에서 나침반의 방향을 돌려놓을 사건들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세상을 바꾼 법정' 시리즈를 통해 과거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대체됐는지를 살펴본 데 이어 '세상을 바꿀 법정' 시리즈를 통해 나침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짚어봤다.

서울시내 한 공사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2024.1.28/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서울=뉴스1) 황두현 기자 = "나이는 마음의 문제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 소설가 마크트웨인의 말이다. 하지만 정년을 앞두고 임금이 줄어든 근로자라면 쉽게 공감하기 힘들다.

임금피크제는 일정 연령부터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근로자의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다. 국내에 처음 적용된 건 2003년. 그로부터 10년 뒤 법적 정년이 60세로 의무화하면서 본격 도입됐다. 정년이 늘면서 생기는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 신규 채용 여력을 창출한다는 취지다.

정부 주도로 급박하게 추진된 탓에 부작용도 나타났다. 정년은 그대로인데 임금이 줄거나, 정년이 늘어났더라도 임금 삭감 폭이 과도한 경우 법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임금피크제 효력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대법원 판단이 나왔지만 구체적인 사례와 쟁점에 따라 법원 판결은 여전히 엇갈리는 상황이다.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소송은 현재 진행형이다.

◇ 정년 60세 의무화로 공공기관 본격 도입…법적 분쟁 현재진행형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2022년 5월 대법원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첫 판단을 내놨다.

정부 산하 연구원으로 근무한 A 씨는 2011년부터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 뒤 직급 강등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며 "임금 차액을 지급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쟁점은 임금과 복리후생 분야에서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고용자고용법(4조의4) 위반 여부였다.

대법원은 소송 제기 8년여 만에 "합리적 사유가 없는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며 A 씨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합리적 사유' 판단 근거로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임금 삭감 폭이나 기간 △임금 삭감 대상 조치의 적정성 △감액된 재원이 도입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등 4가지를 임금피크제 효력 인정 기준으로 제시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2020.12.7/뉴스1 ⓒ News1 이동해 기자

◇ 대법원, 임금피크제 유효성 판단기준 제시…형태 따라 판결 제각각

임금피크제 무효 소송에 대한 첫 대법원 판단이 나오면서 관련 소송이 이어졌지만 법원은 구체적인 운영 형태에 따라 각기 다른 판단을 내놓고 있다.

지난 6월 대구고법은 대구MBC 직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서 1심 판단을 뒤집고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업무량과 근무시간 조정이 없는 임금 감소는 '합리적 사유'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서울중앙지법도 지난해 5월 KB신용정보 직원이 낸 소송에서 임금 삭감 폭이 과도하고 이를 보전할 만한 회사 조치가 미흡했다면 임금피크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광주지법은 지난 5월 대한석탄공사 퇴직자들이 낸 임금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직원은 노조가 조합원 의견 수렴 없이 임금피크제를 결정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노사가 적법한 합의를 거쳐 도입했다"고 판단했다. 또 정년 연장으로 고용 안정성을 높이고 경험이 풍부한 인력을 경제적인 인건비로 고용하는 임금피크제 목적도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공공연구노조 조합원들이 15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앞에서 임금피크제 도입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5.10.15/뉴스1 ⓒ News1 장수영

◇ 근로자 불이익에 판단 갈려…'사전 동의·보상 유무' 쟁점

법원의 각기 다른 판단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법조계에서는 근로자와 기관(기업) 간 합의 여부, 임금 삭감에 따른 보상 조치의 유무가 주요 판단 근거라고 본다.

노무사 출신 김남석 변호사는 "다수 판결은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지만 근로자 동의가 없었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라며 "불이익을 입게 (취업규칙이)바뀌면 동의 여부를 따지게 되고, 불이익이 없다면 동의 없이 의견 청취만 하면 되기에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년을 유지하면서 임금을 삭감하는 '정년유지(보장)형'과 달리 정년이 늘어난 '정년연장형'은 임금 삭감에 대한 보상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로 폭넓게 인정되는 추세다.

실제 KT 직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임금피크제 무효를 주장하며 소송을 냈으나 1·2심에 이어 대법원도 원고 패소 판결했다.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매년 임금을 10% 깎은 KT 조치가 합당하다고 보면서 경영상 이유로 임금피크제 도입 취지도 정당했다고 봤다.

한 대형 로펌 노동 전문 변호사는 "정년 연장으로 임금이 줄어들더라도 근로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에 적절한 조치가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라며 "정년 연장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을 때보다 임금을 더 적게 받는 경우는 무효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향후 판결이 누적되면 임금피크제 유효성을 가늠할 주요 쟁점이 가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변호사는 "대법원이 제시한 4가지 중 무엇을 우선적으로 봐야 할지, 동일하게 판단해야 할지 여부는 앞으로 나올 대법원 판례를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ausur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