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인"…지적장애인 가스라이팅의 시작과 끝[사건의재구성]
80대 건물주 살해 지시한 모텔 주인…장애 수당에 급여도 착복
- 홍유진 기자
(서울=뉴스1) 홍유진 기자 = "내가 형이 되어 줄게."
두 남자의 어긋난 우애는 2019년 시작됐다. 김 모 씨(당시 27세)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뒤 홀로 노숙 생활을 해왔다. 그런 김 씨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인근에서 모텔을 운영하는 조 모 씨(당시 40세)였다. 김 씨는 조 씨가 운영하는 모텔에서 주차관리 등 일을 도우며 함께 살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날부로 김 씨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형님'이 생겼다. 실제로 그는 휴대전화에 조 씨를 그렇게 저장했다. 조 씨는 김 씨에게 "난 널 믿고, 넌 날 믿으니까 우리가 가족인 거야", "○○이가 어른이 되었구나", "형 속마음은 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해, 사랑하는 동생"이라고 속삭이는 등 가족처럼 행세했다.
하지만 조 씨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김 씨가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 씨의 IQ(지능지수)는 47. 김 씨를 손아귀에서 주무르는 건 조 씨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 씨는 김 씨가 충성을 바친 유일한 대상이었다.
조 씨의 타깃은 하나였다. 자신이 운영하는 모텔의 옆 건물 소유주 유 모 씨(80대)였다. 평소 조 씨는 재개발 문제와 관련해 유 씨와 오랜 기간 갈등을 빚어왔다. 하지만 그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조 씨는 오랜 기간에 걸쳐 김 씨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며 유 씨에 대한 앙심을 심어줬다. 그는 "네가 없는 사이 유 씨가 네 여자친구를 범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당시 김 씨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급기야 "유 씨를 죽이면 베트남으로 데려가 결혼시켜 주겠다"고까지 했다.
지난해 11월 11일 둘은 모텔 객실에서 함께 잤다. 평소 같았으면 주차장 가건물에서 혼자 잤을 김 씨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오래 계획해 온 범행을 단 하루 앞두고 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조 씨가 말했다. "넌 중요한 사람이야. 내일 유○○한테 힘을 보여주려면 푹 자야 해"
다음 날 오전 7시 54분. 알람을 듣고 눈을 뜬 김 씨에게 조 씨가 말했다. "흉기를 든 가방을 챙겨. 옥상에서 기다렸다가 유 씨를 발견하면 그냥 죽여. 목격자가 있으면 같이 죽여."
그렇게 김 씨는 조 씨의 말을 실행에 옮겼고, 이후 강릉으로 도주했다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도 "우리 형 나쁜 사람 아니니 잡아가지 말라", "내 친형이고, 날 구해준 은인이다"고 진술하며 조 씨를 감쌌다.
하지만 경찰 조사 과정에서 조 씨의 살인 교사 범행이 들통났다. 범행 이후 폐쇄회로(CC)TV를 삭제하는 등 증거를 인멸한 정황도 포착됐다. 이후 조 씨가 김 씨에게 3년간 임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은 사실과 그가 김 씨의 장애인 수급비를 편취한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둘 다 재판에 넘겨져 모두 중형을 선고받았다. 서울남부지법 제15형사부(부장판사 양환승)는 김 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조 씨에게 징역 2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조 씨를 향해 "수사 중 수차례 거짓말을 하고 하고 이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씨에게는 "피고인의 지적 장애를 이용한 교사범의 사주에 따라 범행을 저지른 점을 참작했다"고 했다.
cym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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