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시작하면 420일 '소송 지옥', 서류 더미에 짓눌린 판사

[재판지연 해법 찾기]① 무의미한 법정과 잦은 인사이동

편집자주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는데도 법원이 이를 지키지 못해 국민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취임 일성으로 '신속한 재판'을 약속하며 한 말이다. 취임 직후 주요 법원장들을 직접 재판에 투입했고 재판장과 배석 판사의 임기를 1년씩 늘렸다. 법원 행정처의 상근 법관도 10명에서 17명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재판 지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뉴스1은 사법부의 최대 숙제가 된 재판 지연의 근본 원인과 해결 방안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모습. /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서울=뉴스1) 이세현 정윤미 서한샘 기자 = "민사 420.1일, 형사 223.7일"

우리나라 1심 재판에 평균 걸리는 시간이다. 10년 만에 민사 재판은 반년, 형사 재판은 2개월 늘었다. 재판 지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우리나라 재판은 구조적으로 절대 빨리 진행될 수가 없다"며 "전반적으로 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해결은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는 "형사도, 민사도 현재 제도하에서는 '하세월' 재판이 가능하다"며 "(판사) 인사이동까지 버티다 다음 재판부에 넘길 궁리를 하면 그만"이라고 지적했다.

◇ 사건 줄었는데 재판 기간 1년 만에 두 달 늘어

4일 대법원이 발간한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민사본안 사건의 1심 접수 건수는 74만4123건으로 전년 대비 8.66% 감소했다. 항소심 접수 건수도 5만7490건으로 6.74% 줄었다. 형사재판 1심 접수 건수 역시 21만9908건으로 전년 대비 2.84%, 항소심 접수 건수도 7만1167건으로 2.89%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민사 본안 사건 1심 합의부의 평균 처리 기간은 364.1일에서 420.1일로 두 달 가까이 늘었다. 2심 역시 고법은 332.7일, 지법은 324.2일로 전년 대비 각각 29일, 24일씩 더 걸렸다.

사건은 줄었는데 재판 기간은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재판 지연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방증이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사건 평균 처리 기간은 민사 본안(1심 합의)이 2013년 245.3일에서 2022년 420.1일로 약 175일, 형사공판(1심 합의 불구속)이 같은 기간 158.1일에서 223.7일로 약 66일 길어졌다.

◇'서면'의 늪에 빠진 민사재판…일단 내고 보자

민사 재판의 경우 쟁점이 정리되지 않은 서면이 난무하는 것이 가장 문제라는 지적이다.

변호사가 쟁점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내고 보자'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서면을 제출한다는 것이다.

민사소송규칙은 준비서면의 분량이 30쪽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피해 쟁점별로 30쪽씩 몇번에 걸쳐 준비서면을 내는 '꼼수'까지 만연할 정도다.

변론기일 하루 전 수십장에 달하는 서면을 제출해 재판부와 상대방 모두 검토하지 못해 변론기일이 공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재판부가 변호사에게 쟁점을 물어보면 "다음 기일 전까지 서류로 내겠다"며 즉답을 피하는 경우도 많다. 법정의 의미가 무색하다는 지적이다.

민사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사건의 쟁점을 잘 알면 오히려 더 짧게 서면을 내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다"며 "변호사들이 사건에 대한 숙지도 제대로 못 한 상태에서 재판을 들어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꼭 필요한 내용만 넣어 10페이지 이내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변론기일 횟수도 제한해 재판이 늘어지는 것을 막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사소송이 전자소송으로 진행되며 증거를 제출하기 쉬워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종이로 증거를 제출하던 때에는 변호사들이 서류를 분류해 '갑호증' 또는 '을호증'으로 번호를 매겨 정리해 제출했다. 갑호증은 원고가 내는 서증, 을호증은 피고가 제출한 서증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자소송의 경우 서류를 스캔해 전자소송 홈페이지에 올리면 더 많은 양을 빠르게 제출할 수 있다. 갑·을호증의 번호도 순서대로 자동으로 입력된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최근에는 직원을 두지 않고 혼자 소송을 진행하는 변호사들도 많다"며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증거들을 꼼꼼하게 보지 않고 필요 없는 것까지 한꺼번에 제출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털어놨다.

그는 "판사들은 증거들을 종이로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송자료들을 출력하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1 DB ⓒ News1 이광호 기자

◇매년 바뀌는 재판부…변경 때마다 갱신 절차 다시 밟아야

잦은 인사이동으로 재판부 구성이 자주 바뀌고, 그때마다 갱신 절차를 반복해야 하는 것도 재판을 늘어지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형사소송법은 공판 도중 판사가 바뀌면 공소사실 요지 진술과 피고인 인정 여부 진술, 증거조사 등을 다시 하는 등 절차를 갱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민사재판 역시 변론 절차를 갱신해야 한다.

형사소송규칙에 따르면 공판절차 갱신에서의 증거조사는 피고인과 검사가 모두 동의하면 간략하게 진행할 수 있지만 피고인 측에서 동의하지 않을 경우 법정에서 지난 재판부에서 진행했던 증인신문 녹음파일을 전부 재생해 듣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1심 재판의 경우 도중에 재판부 구성원이 모두 바뀌자, 함께 기소된 박병대 전 대법관이 증인신문 녹음파일을 전부 재생하자고 주장하면서 약 7개월간 녹음파일을 재생하며 사실상 재판이 멈추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재판장의 임기는 2년, 배석판사의 임기는 1년이었다. 사실상 매년 재판부 변경이 이뤄진 것이다.

복잡한 주요 사건의 경우 갱신 절차가 끝나면 사건을 제대로 심리할 시간도 없이 다음 인사가 목전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1월 재판장의 최소 사무 분담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개정하고, 재판장이 아닌 법관의 경우 1년에서 2년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잦은 재판부 교체에 따른 사건 심리 단절과 중복이 재판 지연을 심화하는 주된 원인으로 꼽혀 왔던데 따른 조치다.

한 현직 판사는 "법 개정 없이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신속한 재판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공판중심주의' 원칙이지만…실제로는 '수사 기록' 기반 재판

우리나라 형사재판은 공판중심주의를 주요 원칙으로 세우고 있다. 공판중심주의는 모든 증거를 개방된 법정에서 제시하고, 법정에서 형성된 심증만을 토대로 심판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판중심주의가 법정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원칙과 달리 실제로는 수사 기록에 기반한 재판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조선인을 재판하면서 검찰과 사법경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넓게 인정했다. 번거로운 통역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미군정도 신생국가인 한국에서 수사기관의 조서를 쓰지 않는 데 부담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종적으로 경찰 작성 조서는 내용을 인정할 때만, 검찰 조서는 법정에서 진정성립이 됐을 경우만 증거능력이 부여되는 현행 제도가 자리 잡았다.

판사를 '사건의 실체를 판단하는 자'가 아닌, 이미 제공된 '수사 기록을 판단하는 자'로 남겨둔 것이다. 이 같은 관행은 오늘날 재판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한 부장판사는 "제대로 공판중심주의가 실현되려면 수사 기록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법관이 재판에서 처음부터 심증을 쌓는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며 "그러나 우리나라는 '수사 기록의 증거능력을 따지는 재판'을 주로 하고 있다. 그러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효율적이지 못한 증인신문 절차도 재판 지연의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통상 형사재판에서 증인신문은 △검사가 수사 시 작성한 조서를 바탕으로 "당시 이렇게 대답한 것이 맞느냐"고 묻고 나면 △변호인이 "이 부분이 사실과 다르지 않으냐"고 반대신문하고 △법관은 의문이 생길 경우 중간중간 질문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조서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물어보는데 대부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현직 판사는 "수사 기록만 되풀이해 질문하는 증인신문은 의미가 없다"며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해서 효율적인 핵심 질문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s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