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인 내세워 병원 세운 비의료인…대법 "유령회사 인정돼야 처벌"(종합)

의료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 집행유예…대법 "다시 심리"
"재산 출연 없거나 부당 유출 사실 확인돼야 처벌"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 합의체 선고를 위해 착석해 있다. 2023.7.17/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서울=뉴스1) 박승주 기자 = 비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 뒤에 숨어 병원을 개설한 것으로 보고 처벌하려면 비의료인이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의료법인을 탈법적인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점이 확인돼야 한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의료법은 의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의료법인 등이 아닌 자가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간 대법원은 비의료인이 병원 시설·인력 관리, 개설 신고, 의료업 시행, 필요 자금 조달 등을 주도적인 입장에서 처리했는지를 기준(주도성 법리)으로만 의료법 위반 여부를 판단해 왔는데, 이번에 더 엄격한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17일 의료법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구고법으로 돌려보냈다.

B의료법인 이사장인 A씨는 의사가 아닌데도 의료기관을 개설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의료기관 실질적 개설자가 B의료법인이 아닌 A씨 개인으로 보고 재판에 넘겼다.

재판 과정에서 A씨는 "실질적으로 의료법인을 만들어 운영했으므로 의료법 위반이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의료법인은 형식에 불과하고 A씨가 의료기관의 실질적 개설자라고 봤다.

1심 재판부는 "의료법인 이사와 감사가 모두 A씨 가족과 지인들로 구성됐고 이들 대부분은 의료법인 운영 경력이나 의료기관 종사 경력이 없다"며 "의료법인 운영과 관련한 중요 사항은 A씨가 결정하고 이사회는 단순히 이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또 "A씨 경력이나 경제력 등을 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려서까지 의료법인을 설립하고 운영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며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A씨는 "의료법인이 설립된 뒤 개인재산으로 의료법인 채무 5억2000만 원을 갚았고, 의료법인 수입은 의료기관을 위해 사용했다"며 항소했다.

2심도 혐의를 유죄로 봤지만 양형이 무겁다며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A씨가 경영난에 처하자 자기 재산을 처분해 운영비로 사용하고 직원 급여 등을 지급한 점 등을 고려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1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 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2023.7.17/뉴스1 ⓒ News1 허경 기자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심리가 부족했다며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다수의견(8명)은 "비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의 개설·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의료법인에 출연하는 것은 허용되고 의료법인 이사 지위에서 의사결정이나 업무집행에 참여하거나 주도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주도성 법리를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의 개설자격 위반 판단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비의료인에게 허용되는 행위와 허용되지 않는 행위의 구별이 불명확해져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반할 수 있다"고 짚었다.

A씨를 처벌하려면 A씨가 병원 개설·운영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기본으로, A씨가 외형만 갖춘 의료법인을 탈법 수단으로 악용해 적법한 의료기관의 개설·운영으로 가장했다는 사정이 인정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실질적으로 재산 출연이 이뤄지지 않아 실체가 인정되지 않는 의료법인을 의료기관 개설·운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사정이나, 비의료인이 의료법인의 재산을 부당하게 유출해 의료법인의 공공성·비영리성을 일탈했다는 사정이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A씨가 개설자격을 위반해 병원을 개설·운영하였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심리와 판단이 필요하다고 봤다.

다만 박정화·민유숙·김선수·이흥구·오경미 대법관은 "다수의견이 세운 기준으로는 피고인의 행위와 고의를 전체적·통합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고 개설자격 위반의 인정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들은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고자 하는 의료법의 입법목적을 해치고 나아가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건전성을 위협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재산이 출연되지 않아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할 수 없는 의료법인을 의료기관 개설을 위해 악용하거나 의료법인의 공공성과 비영리성을 일탈하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된다"며 "이러한 행위를 하면 개설자격을 위반해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한 것으로 평가돼 처벌대상이 된다"고 설명했다.

parks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