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짜리 주택, 1000만 원 설계로 지을 수 있을까?[집이야기]

설계비 저평가, 건축 품질 저하로 이어져
'민간대가 기준 법제화' 17년만에 다시 국회로

ⓒ News1 양혜림 디자이너

"10억 원짜리 건물을 천만 원짜리 설계로 맡길 수 있습니까?"

(서울=뉴스1) 한지명 기자 = 건축 설계비 저평가는 업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오랜 숙제다. 민간 건축 시장에서 설계비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저가 경쟁이 심화하고 설계 품질 저하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 설계비 기준 마련을 위한 법안이 발의되면서, 건축업계 전반에서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설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는 현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다.

김정관 건축사(도반 건축사사무소)는 대한건축사협회에서 발행하는 '건축사신문'을 통해 10여 년 전 경험한 설계비 저평가 사례를 소개했다.

당시 김 건축사를 찾아온 건축주는 150㎡ 규모의 단독주택을 짓기 위해 건축사를 물색하고 있었다. 지가만 5억 원에 달하고, 공사비까지 합쳐 10억 원에 가까운 집이었다. 그러나 건축주가 만난 건축사들은 천만 원 이하의 설계비를 제시했으며, 건축주는 이러한 설계비에 의문을 품고 김 건축사를 찾았다.

김 건축사는 건축주에게 "당신이 건축사라면 설계비 천만 원으로 10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맡겠습니까?"라고 되물었고, 건축주는 "그래서 건축사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천만 원으로는 제대로 된 설계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면서도, 그 이상을 제시하는 건축사를 만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김 건축사는 "단독주택 설계는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 가족이 행복하게 살 집을 설계하는 작업"이라며, 설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민간대가 기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6년 제정되어 1993년까지 6차례 개정을 거쳤으나, 독과점 논란으로 폐지와 재도입이 반복됐다. 이후 2008년 민간대가기준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건축 설계 시장의 혼란이 시작됐다.

업계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제 살 깎아 먹기식 저가 수주가 이어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해외에서는 공사비의 10% 정도를 설계비로 책정하지만, 국내는 절반 수준에 그친다. 특히 저가 경쟁 탓에 민간 설계대가는 공공 설계대가의 10~30% 수준에 불과하다. 일부 건축사들은 "30년 전보다 설계비가 더 낮아졌다"고 토로한다.

지난해 12월 19일 국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됐다. 2만 5000명 건축사의 숙원이었던 '민간대가 기준 법제화'가 국회 첫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는 2008년 관련법 폐지 이후 17년 만의 움직임이다.

민간 건축물은 건축 서비스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지만, 설계비 기준이 없어 저가 수주 경쟁이 지속돼 왔다. 법안 발의는 이러한 출혈 경쟁을 막기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 13명이 발의한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민간 부문에서도 설계비 기준이 마련돼 출혈 경쟁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설계비 협상 과정에서 일정 부분 자율성이 남아있어, 설계비가 낮게 책정될 가능성이 있다. 협회 관계자는 "적정 설계비가 보장돼야 건축물의 품질이 확보되고, 이는 곧 국민의 안전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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