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합의'는 뒷전…'세계유산 자축'에 바빠 한일관계 망친 日

추도식 매년 개최하기로 했지만 첫해부터 파행…日은 韓에 책임 전가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 개발종합센터에서 열린 '사도광산 추도식'에서 한국 정부 관계자 및 유가족이 불참한 가운데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차관급) 및 참석자들이 추모 묵념을 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일본 주최 사도광산 추도식에 우리 정부가 불참하기로 결정했으며 사도광산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은 별도로 추모 행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24.11.24/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서울·사도시=뉴스1) 노민호 정윤영 기자 = '훈풍'을 타고 있던 한일관계 개선 흐름이 고질적인 과거사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일본의 한계와 무성의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일본이 조선인 강제징용의 현장인 사도광산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장이 아닌 '세계유산 등재 자축의 장'으로 삼으면서다.

니가타현 사도시에 위치한 사도광산은 에도시대 금광으로 일본이 문화유산으로 내세우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2000여 명이 끌려가 강제로 노동했던 장소라는 아픈 역사가 담긴 장소로 한일 간 과거사 문제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기간(1941~1945년)에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사도광산을 활용했다. 당시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조선인을 대거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이곳이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에 이어 한일 간 과거사 문제의 핵심 현안이 됐다.

일본은 처음엔 조선인 강제노역이 이뤄진 시대를 제외한 에도시대(1603~1867)로 한정해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이곳이 일본의 '최대 금광'이었다는 역사만 부각하려 한 것이다.

정부는 이에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역 역사를 사도광산 유적 설명에 반영하도록 일본 측에 여러 차례 요구해 왔다.

또 세계문화유산 등재 심사를 담당하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도 지난 6월 일본의 사도광산 등재의 '보류'(refer)를 권고하며 '전체 역사'를 반영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한일 외교당국 간 협의를 통해 일본은 한국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강제동원 피해를 알리는 전시물 설치', '매년 7~8월 사도광산 추도식 개최'를 약속하면서 한국의 동의를 얻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24일 오전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내 작은 전시실에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 설명하는 패널 등이 설치되어 있다. 한편 정부는, 일본 주최 사도광산 추도식에 우리 정부가 불참하기로 결정했으며 사도광산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은 별도로 추모 행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24.11.24/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일본은 세계유산 등재에 앞서 광산에서 2㎞ 거리인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에 강제동원 안내전시물을 설치했고, 정부도 이를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로 평가해 왔다. 하지만 전시물에는 '강제'라는 표현이 빠졌으며, 일부 왜곡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 게재되며 일본의 진정성에 의구심이 제기됐다.

이와 함께 한일 합의에 따라 매년 7~8월쯤 개최될 예정이던 추도식은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 등 내부 사정 등으로 차일피일 미뤄져 결과적으로 11월 말에서야 날짜가 잡혔다.

문제는 날짜를 확정하고 행사의 세부 내용을 협의하는 이상한 모양새로 행사가 추진됐다는 것이다. 일본은 추도식 이틀 전인 지난 22일에야 추도식에 참석하는 정부 대표를 통보했는데, 과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정치 신인인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을 대표로 결정하며 다시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여기에 추도사에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와 관련한 언급을 해달라는 정부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추도식 개최를 하루 앞둔 23일 정부는 외교채널을 통해 일측에 불참 입장을 공식 전달하고 사도광산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별도의 추모식을 개최하기로 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 사도광산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열리는 '사도광산 추도식'에 불참 결정을 내렸다고 23일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추도식을 둘러싼 양국 외교당국 간 이견 조정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치 않아 추도식 이전에 양국이 수용 가능한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2024.11.23/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일본의 이런 태도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라는 '자축'에만 집중하고 추도식을 한일관계의 주요 사안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도광산이 위치한 니가타현의 하나즈미 히데요 지사는 지난 20일 이번 추도식이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관여해 온 사람들에게 보고하는 자리"라고 언급했는데, 여기에 일본 정부의 기본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평가다.

일본 외무성은 24일 주한일본대사관을 통해 배포한 입장에서도 "사도광산이 올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추도식이 개최되는 것을 감안해 정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외무성에서 홍보·문화 및 아시아대양주 정세를 담당하는 이쿠이나 정무관의 참석을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쿠이나 정무관의 참석 결정에 한국 정부를 배려하려는 입장이 없었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기도 하다.

일본은 또 "한국과는 정중한 의사소통을 실시해 왔다"라며 "이런 가운데 이번에 한국 측이 불참한다면 유감스럽다"라며 행사 파행의 책임을 우리 측에 돌리기도 했다.

이번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로 매년 열기로 한 추도식의 정상적 개최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일본 측의 재발 방지 등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둔 한일관계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관측이다.

ntig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