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협력 강화하되 中 타깃화엔 선 그어야[한중일 글로벌 삼국지]

'한미일 안보 협력각서' 미일동맹 하부구조 편입 단초 우려
한미일 협력 증진과 함께 한중일 협력 강화도 놓쳐선 안 돼

백범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초빙교수(전 한중일협력사무국(TCS) 사무차장).

(서울=뉴스1) 백범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초빙교수 = 지난 7월 28일 도쿄에서 개최된 한미일 국방장관회의에서 3국 국방장관은 '한미일 안보협력 프레임워크(TSCF) 협력각서(MOC)'에 서명했다. 이는 한미일이 (기속력은 없지만) 문서로 '군사협력'을 제도화한 최초 사례다. 각서는 중국과 북한을 겨냥해 ‘△한미일 연합훈련과 국방장관 회의를 정례화하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인-태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현상을 변경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반대한다'는데 초점을 맞췄다. 3국은 표준작전절차(SOP)에 대한 합의에도 접근했다.

그 보다 약 1개월 전인 지난 6월 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북, 김정은과 '북러 포괄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했다. 대북 최대 후견국을 자처하는 중국은 러시아와 밀착하는 북한에 잇달아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전략 요충지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일이 대표하는 해양세력과 중러가 대표하는 대륙세력 간 갈등과 대립이 보다 더 첨예화, 복잡해지고 있다.

144년 전인 1880년 외교사절로 방일(訪日)한 김홍집은 주일 청 외교관 황쭌셴이 지은 '조선책략'을 들여와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에 소개했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친청(親淸), 결일(結日), 연미(聯美)'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은 러시아가 조선을 회유 또는 위협하여 원산이나 부산, 남포 등의 항구를 조차(租借)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러시아가 조선 항구를 차지하면, 톈진이나 다롄, 웨이하이 등 베이징 일대를 에워싼 보하이만 항구들이 직접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책략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륙세력 러시아의 남하 저지를 위한 '조선 이용 책략'이었던 것이다. 이면에는 조선을 계속 속국으로 삼으려는 청의 야욕이 숨어있었다. 청은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한 나머지 조선으로 하여금 1882년 미국, 1883년 영국과 수교하게 했다.

1884년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인해 조선의 조야 모두 갈팡질팡하던 1885년 4월 대영제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했다.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은 러시아 해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영·러 대립은 같은 해 3월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인해 군사충돌 직전에 이르렀었다.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서라도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 원산항 등을 획득할 목적으로 군사훈련단 파견을 포함한 조선의 요청에 응했다. 영국은 러시아가 원산만을 조차, 군사기지화하려 한다고 판단해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이다.

영·러는 1813년부터 1907년까지 약 100년 간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란 이름 아래 크림반도. 다다넬스-보스포러스 해협, 이란, 아프가니스탄, 동투르케스탄(신장), 한반도 등 유라시아대륙 동서 전역에서 전략적 경쟁을 벌였다. 쿠릴열도와 알류샨 열도, 하와이, 알래스카가 게임 대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우리 영토 가운데 영국, 러시아,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 간 가장 치열한 경쟁 대상이 됐던 곳은 동중국해와 동해, 오츠크해를 잇는 대한해협의 '아르고스의 눈' 부산 절영도(영도)다. 개항 직후인 1879년 일본이 영도에 무단으로 창고를 짓고자 했고 1889년 러시아가 영도에 석탄 창고, 즉 저탄소(貯炭所) 설치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1897년 러시아가 저탄소 설치를 위해 영도 조차를 요구했고, 1904년 러일 전쟁 개전과 동시에 일본이 영도에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신원식(오른쪽) 국방부 장관,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 기하라 미노루 일본 방위상 (공동취재)./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러시아의 야욕은 소련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영국에 저지당해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홋카이도, 쓰시마, 제주도와 함께 영도를 포함한 부산 점령을 적극 검토했다.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러시아, 20세기 중반부터 말까지의 소련, 현재의 중국 등 대륙세력의 팽창 위협에 대한 영미 포함 해양세력의 두려움은 매우 넓고도 깊다. 이는 조선(대한제국) 멸망의 단초이자 결정적 사유가 되기도 했다. 1895년 왕비 민씨가 시해(殺害)당한 후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 감금당해 있던 고종은 1896년 2월 왕세자(순종)와 함께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아관파천)했다. 이는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동시에 영미가 조선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적 사유가 됐다. 대외정책 최대 목적 중 하나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던 미·영에게 러시아와 밀착한 조선을 더 이상 끌어안고 갈 이유가 없어졌다.

'한미일 안보협력 프레임워크 협력각서' 채택은 한국이 미일 동맹의 하부구조로 편입되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일부 우려가 있다. 하부구조에 편입된 나라치고 국방안보, 경제와 산업 등 측면에서 잘 된 나라가 거의 없다. 유라시아대륙 동단의 분단국이자 지정학적 단층선상의 통상국가 한국에게 중국을 겨냥한 미일동맹과의 군사협력은 어떤 함의가 있을까?. 향후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주미 및 주유엔 대사를 지낸 한 원로 외교관은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한국 스스로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면서, "한미일 3국 협력 강화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전제 아래 한미일 3국 협력을 강화하되 중국을 직접 타깃으로 하는 정책이나 행동에는 선을 긋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라고 강조했다.

계획이 실패해 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뜻하는 '낭패(狼狽)'라는 말이 있다. 낭패는 '낭(狼)'과 '패(狽)'라는 상상의 동물에서 유래된 성어(成語)다. '낭'은 뒷다리가 짧거나 아예 없고, '패'는 앞다리가 없거나 매우 짧은 동물로 낭과 패는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둘 모두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은 안보 및 경제적으로 미국, 중국 등과 비교열위(比較劣位) 입장에서 낭과 패의 관계에 있다. 한국은 조선말과 같은 '쇠망(衰亡)'의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돌다리도 두드려가면서 건너야 한다. 한미일 협력 증진과 함께 한중일 협력 강화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 살길을 찾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