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국 차관도, 주재 대사도 몰랐다…러 대변인 '일탈'은 왜?
방한 루덴코 차관, 김홍균 1차관 만날 때까지도 '막말' 인지 못해
안보실장과 면담도…韓 입장 설명 및 러 조치 요구한 듯
- 노민호 기자
(서울=뉴스1) 노민호 기자 =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의 윤석열 대통령 비난 발언은 러시아 내부에서 대(對)한국 외교 기조에 혼선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장면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발언이 한러관계 관리를 위해 차관급 인사가 한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나왔는데, 정작 방한하는 안드레이 루덴코 차관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으로 확인되면서다.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은 지난 1일부터 나흘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루덴코 차관의 방한은 당초 지난해 9월 추진됐다가 한 차례 무산된 바 있다. 당시 북러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이었으나 러시아 측 사정으로 무기한 연기됐다.
이후 북러 무기 거래 등 군사협력 심화 동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특히 최근 미 백악관을 통해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쓰일 탄도미사일을 러시아에 제공했고 실제 이를 전장에 활용했다는 관측도 나왔다.
이런 가운데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 지원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는 살상무기 지원은 하지 않는다는 우리 정부의 방침에서 한 발 더 나간 입장으로 해석됐다.
외교가에선 신 장관의 발언이 이번 루덴코 차관 방한의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는다. 러시아 입장에선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실제 무기를 지원할 생각이 있는지를 실제 살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지적이다.
한국 입장에서도 북러 밀착과 노골적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위반 행보를 보이는 러시아의 입장과 설명을 들으며 정세 판단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한러 모두 각자의 필요성에 따라 루덴코 차관의 이번 방한이 성사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루덴코 차관의 방한이 있기 전 러시아는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신임 주한 러시아대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국은 비우호국 중에 가장 먼저 우호국으로 복귀할 것" 등 진정성을 떠나 일단 한러관계의 개선 의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 왔다.
하지만 루덴코 차관이 한국에 도착한 이튿날인 2일,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한국시간으로 같은 날 새벽 윤 대통령의 발언을 직접 겨냥한 비판 메시지를 내놓는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북한의 '핵 선제 사용 법제화'를 비판한 윤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편향적"이라며 "미국과 한국, 일본을 포함한 그 동맹국들의 뻔뻔스러운 정책으로 한반도와 그 주변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 발언은) 특히 혐오스럽다"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복수의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자하로바 대변인의 발언이 나온 당일 루덴코 차관은 오전에 김홍균 제1차관을 예방했다. 하지만 예방 당시 관련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루덴코 차관은 이후 김건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한러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가지고, 끝으로 정병원 외교부 차관보와 면담했다.
외교부는 공식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지만 외교 시스템상 우리 정부는 루덴코 차관의 면담을 계기로 자하로바 대변인의 발언에 대한 우리 입장을 전달하고 러시아 측의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장호진 국가안보실장도 3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루덴코 차관을 별도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실장은 윤석열 정부 초대 주러시아대사를 지낸 '러시아통'이다. 루덴코 차관은 장 실장의 대사 시절 카운터 파트다. 이번 면담 자리에서도 자하로바 대변인의 발언에 대한 우리 정부 입장이 전달된 것으로 전해졌다.
장 실장이 루덴코 차관을 만난 3일은 우리 외교부가 오전부터 자하로바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수준 이하로 무례하고 무지하며 편향돼 있다"며 공식 비판하는 입장문을 출입기자단에게 문자메시지 형식으로 배포하고, 오후엔 정병원 차관보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를 외교부로 초치해 항의의 뜻을 전한 날이다.
외교가에선 이번 사태가 러시아 내의 '엇박자'로 인해 발생했을 것에 무게를 싣고 있다. 대북 협력 강화 기조에서 러시아 외무부의 한반도 파트 내에서 '북한에 더 밀착해야 한다'라는 입장과 경제적, 외교적 파장을 고려해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대북 외교에 공을 들이고 있어 만일 러시아 내에서 이견이 존재해도 이번 상황이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아울러 한국의 입장에서도 3월 러시아의 대선이 끝난 뒤 북러 정상회담이 진행된 뒤에야 한러관계의 변곡점 모색이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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