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대사가 손 내밀자, 본국은 '욕설'…싸인 안 맞는 러시아

외교 차관 방한 앞두고 돌연 '거친 발언'으로 한러 '설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악화된 관계, 개선은 물론 '관리'도 쉽지 않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펄럭이고 있는 러시아와 북한 국기.ⓒ AFP=뉴스1

(서울=뉴스1) 노민호 기자 = 오랜만에 한국과의 소통을 시도한 러시아가 외교 당국 내에서 엇박자 행보를 보이면서 갈등의 불씨만 키웠다. 주한 러시아대사는 관계 개선 의사를 피력했지만, 본국에선 돌연 윤석열 대통령을 공개 비난하면서 '설전'이 벌어졌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은 지난 2일 한국을 방문해 김홍균 외교부 제1차관 예방, 정병원 차관보와 김건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 외교부 인사와 '릴레이 면담'을 가졌다.

루덴코 차관의 방한은 당초 지난해 9월 추진됐다가 러시아 측 사정에 따라 미뤄진 바 있다. 이번 방한은 4개월 만에 밀린 '과제'를 한 것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북러 밀착 속 한러 간 의미 있는 대면 소통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방한은 지난달 9일 공식 활동을 시작한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가 최근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비판적인 논조이긴 해도 '한러관계 개선'에 대한 의사를 피력한 가운데서 이뤄진 것이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지난 19일 보도된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한국을 미래의 파트너로 생각할 의향이 있으며, 양국 간 관계도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지노비예프 대사의 발언 중 '레드라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직접적인 무기 지원을 말하는 것인데,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무기를 직접 지원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노비예프 대사의 발언을 두고 '관계개선 의사'가 표출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루덴코 차관의 방한이 이달 2일 이뤄진 것을 보면, 지노비예프 대사의 인터뷰는 고위급 인사의 방한을 앞두고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러시아 본국에서 돌연 한국을 향한 '선을 넘는' 거친 발언이 나왔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지난 1일(현지시간) 북한의 '핵 선제 사용 법제화'를 비판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편향적"이라며 "미국과 한국, 일본을 포함한 그 동맹국들의 뻔뻔스러운 정책으로 한반도와 그 주변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 발언은) 특히 혐오스럽다"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 AFP=뉴스1

이 시점은 이미 루덴코 차관이 방한 후 외교부 인사들을 만난 이후다. 외교에서 상대국 정상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하는 사례는 극히 드문 데다가, 정부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외무부 대변인이 공개적으로 이를 언급했다는 점, 한러 외교 당국 간 고위급 소통이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 이러한 발언이 나왔다는 점에서 파장이 일었다.

우리 외교부는 3일 입장문을 통해 자하로바 대변인의 발언이 "수준 이하로 무례하고 무지하며 편향돼 있다"라고 맞받아치며 "러시아의 지도자가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인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야말로 국제사회를 호도하려는 억지에 불과하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같은 날 정병원 차관보는 외교적 항의의 표시로 활용되는 '주한 러시아대사 초치'를 단행했다.

외교가 안팎에선 러시아의 이런 엇박자 행보를 두고 북러 밀착 국면에서 '북한 편들기'를 지나치게 의식한 데 따른 결과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러시아는 북한으로부터 재래식 무기뿐만 아니라 수십 발의 탄도미사일과 복수의 미사일 발사대를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이 '주춤'한 가운데 북한산 무기를 공급받은 러시아는 전쟁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

특히 이번 자하로바 대변인의 발언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는 3월 러시아의 대선 이후 북러 정상회담이 예상되고 있는 시점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 외교 당국이 북한을 비판한 한국에 날을 세워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을 수도 있다.

루덴코 차관이 작년 방한 추진 때와 달리 비공개로 방한하기로 협의된 것 역시 러시아의 이런 기조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한국 역시 필요 이상으로 거리를 둘 수는 없는 외교 상대지만, 북한과 밀착하는 국면에서는 북한을 더 배려 혹은 의식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한러관계 개선 발언 및 루덴코 차관의 방한 등은 결국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무기 지원이라는 '레드라인'을 관리하기 위한 외교전의 일환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여전히 한러 간 소통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번 러시아의 '엇박자'가 이를 보여 주는 장면이라는 해석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러시아는 북한을 의식하면서도 경제·외교에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라며 "하지만 당장은 한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적으로 무기를 지원하는 건 러시아에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 놓인) 러시아의 외교가 정교하지 못하다는 게 드러난 것"이라며 "특히 상대국의 대통령을 거론하며 북한 편들기를 했다는 것은 명백한 러시아 외교의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ntiger@news1.kr